나의 이야기

대인연경 - Mahānidānasutta

날고집이 2022. 1. 4. 17:04

# Mahānidānasutta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 paṭiccasamuppāda)

 

95. Evaṃ me sutaṃ ekaṃ samayaṃ bhagavā kurūsu viharati kammāsadhammaṃ nāma

kurūnaṃ nigamo. Atha kho āyasmā ānando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

Ekamantaṃ nisinno kho āyasmā ānando bhagavantaṃ etadavoca

‘‘acchariyaṃ, bhante, abbhutaṃ, bhante!

Yāva gambhīro cāyaṃ, bhante, paṭiccasamuppādo gambhīrāvabhāso ca,

atha ca pana me uttānakuttānako viya khāyatī’’ti.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는 꾸루 국의 깜맛싸담마라고 하는

꾸루 족의 도시에 계셨다.그 때 존자 아난다가 세존께서 계신 곳을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한쪽으로 물러나 앉은 존자 아난다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아난다] “세존이시여,

이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873)는 얼마나 깊고, 얼마나 심오하게 출현하는지

세존이시여,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예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아주 명백한 것으로 보입니다.”

 

****

873) paticcasamuippāda : 역자는 연기를 조건적 발생의 법칙이라고 번역하기 때문에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緣起)라고 번역했다. 이것에 대해서는 이 경과 역자의

쌍윳따니까야의 인연품(SN. II. Nidana)의 서문과 내용을 참조하기 바란다.

 

‘‘Mā hevaṃ, ānanda, avaca, mā hevaṃ, ānanda, avaca.

Gambhīro cāyaṃ, ānanda, paṭiccasamuppādo gambhīrāvabhāso ca.

Etassa, ānanda, dhammassa ananubodhā appaṭivedhā

evamayaṃ pajā tantākulakajātā kulagaṇṭhikajātā 

muñjapabbajabhūtā apāyaṃ duggatiṃ vinipātaṃ saṃsāraṃ nātivattati.

 

2 [세존]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874)

이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는 깊고, 심오하게 출현한다.875)

아난다여,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꿰뚫어 보지 못하면,876)

이와 같이 이 뭇삶들은 실타래에 묶인 것과 같이, 마름병에 덮인 것과 같이,

문자 풀에 엉킨 것같이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지옥의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

 

****

.875) gambhīro cāyam ānanda pațiccasamuppādo gambhīrāvabhāso ca :

Smv. 493 Dat. II. 109-11201)에 따르면, 연기는

의미의 심오성(attha-gambhiratā), 원리의 심오성(dhammagambhiratā),

교시의 심오성(desanāgambhirata), 꿰뚫음의 심오성(pativedhagambhirata)

의해서 심오하다.

1) 늙고 죽음(예를 들어 12연기한 지분)의 심오한 의미는

태어남을 조건으로 생겨나 유지되는 것이라는 것에서 의미의 심오성이 성립되고,

2) 태어남이 늙고 죽음의 조건이 되는 원리가 심오하다는 데서 원리의 심오성이 성립되고, 3)경마다 다르게 연기가 순··으로 다양하게 설명된다는 데서 교시의 심오성이 성립된다.

4) a. 무명의 알지 못함(無智:aññāna) ·보지 못함(無見 : adassana) ·

진리에 대한 꿰뚫음이 없음(諦不實: saccāpaṭiveddhata),

b.형성의 유위적 활동(行作:abhisankhāra)· 노력(āyuhana). 탐욕의 유무(sarāgaviragattha)

c. 의식의 공성(sunnata) ·비복무(非服務: avyāpara) · 불이동(不移動 : asankanti) ·

결생(結性: patisandhi) · 출현(出現: pātubhāvattha),

d. 명색의 일생기(一生起 : ekuppāda) ·구별(區別 : vinibbhoga) ·

비구별(非區別.avinibbhoga) · 굴곡(屈曲.namana) · 변괴(變壞.ruppanattha),

e. 여섯 감역의 영향(增上 .adhipati) ·세계(世界 . loka) · 감관(. dvāra) ·

토대(土臺 : khetta) · 영유상태(有狀態:visayibhāvattha),

f. 접촉의 닿음(:phassa마찰(摩擦:Samghattana) ·결합(結合: sangati)·

집합(集合: sannipatattha),

g. 느낌의 소연(所緣: ārammana) ·맛의 영수(領受rasänubhavana) ·즐거움(. sukha)

괴로움(: dukkha중립(中立: majihattabhāva)·

비아의 감수(非我感受: nijjivavedayittattha)

h 갈애의 환희(歡喜:abhinandita). 고집(固執 ajjhosana)· 흐름(. sarita) ·덩굴의 갈애 (lataṭanhā) · 하천의 갈애(nacitanha) · 바다의 차기 어려움(samuddadlppurattha)

i. 집착의 쥠(ādana) · 파악(把握 : gahaṇa) · 탐착(貪着 : abhinivesa) ·

취착(取着 : parāmāsa) · 뛰어넘기 어려움(duratikkammattha),

j. 존재의 노력(努力: āyūhana) · 유위적 활동(行作: abhisarikharana) ·모태(: yoni) ·

행방(: gati) · 존속(存續 : ṭhiti) · 거주에 던져짐(投棄 : khipanaṭṭha).

k 태어남의 출생(出生: jāti) ·탄생(誕生 :sanjāti) ·입태(入胎: okkanti) ·재생(再生 : nibbatti) 출현(出現: pātubhāvaṭtha), .늙고 죽음의 파멸(破滅 :khaya) ·쇠멸(衰滅: yaya) ·

파괴(破壞: bheda) · 변화(變化 : viparinamatṭha)가 심오한 데서 꿰뚫음의 심오함이 있다. 무명 등의 내적인 본성(sabhāva) 또는 핵심적인 특성(sarasalakkhana)의 심오한 데서

꿰뚫음의 심오함이 있다

 

876) etassa ānanda, dhammassa ananubodha anativedh : Smv. 495에 따르면,

이해하지 못하고'라는 것은 알려진 것에 대한 완전한 이해(知遍知 ṅātaparinnā)'

의해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꿰뚫어 보지 못한다.’는 것은 '건넘에 관한 완전한 이해(度遍知 : tiraṇaparinnā)

끊음에 관한 완전한 이해(斷遍知)'를 통해서 꿰뚫지 못한다는 뜻이다.

 

 

 

3. ‘‘‘Atthi idappaccayā jarāmaraṇa’n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ṃ.

‘Kiṃpaccayā jarāmaraṇa’nti iti ce vadeyya, ‘jātipaccayā jarāmaraṇa’nti iccassa vacanīyaṃ.

(1) “아난다여, ‘구체적 조건에 의해서 늙고 죽음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렇다.’라고 대답해야 한다.‘무엇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Atthi idappaccayā jātī’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ṃ.

‘Kiṃpaccayā jātī’ti iti ce vadeyya, ‘bhavapaccayā jātī’ti iccassa vacanīyaṃ.

(2) 아난다여, ‘구체적 조건에 의해서 태어남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렇다.’라고 대답해야 한다.‘무엇을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 (초불연 주석) 청정도론 주석서에

1) 업으로서의 존재(業有); '의도와, 의도와 관련된 탐욕 등이 없이'라고 불리는 법들로 존재() 인도하는 모든 업들.

2) 재생으로서의 존재(生有): 업에서 생긴 무더기들 오온을 말하며,

중생이라는 존재와 개체를 말한다.

882) bhūta : 어원적으로 생성된 것 즉, 존재라는 뜻이다.

빠알리어에서 뭇삶은 어원적으로 존재를 의미하는 'sattai'가 있고, 생명 · 유정을 뜻하는 ‘pāna’ 도 있고, 생성된 것이란 의미에서 생물, 귀신을 뜻하는 'bhuta'도 있다.

 

‘‘Atthi idappaccayā bhavo’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ṃ.

‘Kiṃpaccayā bhavo’ti iti ce vadeyya, ‘upādānapaccayā bhavo’ti iccassa vacanīyaṃ.

(3) 아난다여, ‘구체적 조건에 의해서 존재가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렇다.’라고 대답해야 한다.‘무엇을 조건으로 해서 존재가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초불연 주석):주석서에  1)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 2)견해에 대한 취착(),

3)계율과 의식에 대한 취착(戒禁) 4)자아의 교리에 대한 취착(我語)

 

‘‘Atthi idappaccayā upādāna’n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ṃ.

‘Kiṃpaccayā upādāna’nti iti ce vadeyya, taṇhāpaccayā upādāna’nti iccassa vacanīyaṃ.‘

(4) 아난다여, ‘구체적 조건에 의해서 집착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렇다.’라고 대답해야 한다.‘무엇을 조건으로 집착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Atthi idappaccayā taṇhā’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ṃ.

‘Kiṃpaccayā taṇhā’ti iti ce vadeyya, vedanāpaccayā taṇhā’ti iccassa vacanīyaṃ.

(5) 아난다여, ‘구체적 조건에 의해서 갈애가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렇다.’라고 대답해야 한다.‘무엇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초불연 주석): 갈애(渴愛)는 여성명사로 기본적으로는 갈증, 목마름 등을 의미.

중국에선 주로 로 번역한다.

# 갈애의 분류 :1)일어나는 형태에 따라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

2)일어나는 장소에 따라 6가지로 분류해서, 형태 곱하기 장소 =18가지 안,팎으로 각각 36가지, 그리고 과거,현재,미래로 108가지 가 만들어 진다.

 

--*(전재성 주석):886)

< rupatanhā, saddatanḥā, gandhatanhā, rasatanhā, photthabbatanhã, dhammatanhã> :

한역에서는 육애신(chayime tanhakayā :六愛身)이라고 한다.

여섯 가지 감각대상에 대한 갈구나 갈망을 말한다. 여기에는

형상에 대한 갈애(rúpatanhã :色愛) 소리에 대한 갈애(saddatanhã:聲愛)

냄새에 대한 갈애(gandhatanhã : 香愛) 맛에 대한 갈애(rasatanhā:味愛)

감촉에 대한 갈애(potthabbatanhã:獨愛) 사실에 대한 갈애(dhammatartha:法愛)

있다. 이들은 모두 경험대상인 육경(六境)에 대한 갈애를 뜻하는데,

K Seidensticker는 각각 시각대상에의 갈애, 청각대상에의 갈애, 후각대상에의 갈애, 미각

대상에의 갈애, 신체대상에의 갈애, 정신대상에의 갈애라고 학문적으로 정확히 번역했다.

(K. Seidensticker, Pali-Buddhismus in Übersetzungen. Breslau, 1911)

 

‘‘‘Atthi idappaccayā vedanā’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ṃ.

‘Kiṃpaccayā vedanāti iti ce vadeyya, ‘phassapaccayā vedanā’ti iccassa vacanīyaṃ.

(6) 아난다여, ‘구체적 조건에 의해서 느낌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렇다.’라고 대답해야 한다.‘무엇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Atthi idappaccayā phasso’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ṃ.

‘Kiṃpaccayā phasso’ti iti ce vadeyya, ‘nāmarūpapaccayā phasso’ti iccassa vacanīyaṃ.

(7) 아난다여, ‘구체적 조건에 의해서 접촉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렇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무엇을 조건으로 접촉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명색을 조건으로 접촉이 있다.’] 878) 라고 대답해야 한다.

 

878) nāmarūpaccayā phasso‘ti : Smv.497에 따르면, 여기서

[접촉이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명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은 왜 그런 것일까?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라고 말해지는 경우 시각 접촉 등의 여섯 가지

이숙접촉(異熟接觸. vipakāphassa )만이 포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라고 말해서 포착되는 것도 포착되지 않는 것도

명료한 조건에 의한 발생으로 나타내기 위해, 또한 여섯 감역과는 별도로

접촉의 명료한 조건을 나타내기 위해 이와 같이 명색을 조건으로 접촉이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 (초불연 주석); 정신(nama, )은 느낌, 인식, 상카라들, 알음알이[,,,]

네 가지 무더기[四蘊]를 뜻하고

물질(rupa, )은 물질의 무더기(色蘊)를 의미한다.

청정도론: 정신(nama, )- 대상을 향하여 기울기 때문에 느낌 등

세 가지 무더기들을 뜻한다.

물질(rupa, )- 네 가지 근본물질들과 그 네 가지 근본물질에서

파생된 물질들이다.”(XVII.187)

주석서엔 연기각지(緣起各支)로서

정신은 [느낌·인식·상카라(..)]3온만을 의미하여, 알음알이()는 따로 언급.

 

여기서는 12(十二) 연기의 <여섯 감각장소(六入)가 빠지고

바로 감각접촉은 정신·물질에 조건 지워졌다(名色緣觸)>고 나타난다.

이것이 본경에서 설하는 연기법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주석서는

'조건이 일어남의 특별함 남은 조건의 특별함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결론으로 조건의 근본원인(nidana, 본경의 제목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설명.

달리 말하면, 여섯 감각장소를 넣어 버리면

감각접촉이 모두 여섯 감각장소에서만 조건한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감각접촉이란 반드시 여섯 감각장소만을 조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삼사화합생촉(三事和合生觸)이란 <감각기능(), 대상(), 알음알이()>

셋의 화합으로 감각접촉이 생긴다.

12처 가운데 <.........촉의 10가지와 의 일부>는 물질()이고,

<(, mano)6>정신()이니

오히려 명색(名色)을 조건하여 감각접촉이 있다고 하는 것이

근본원인(nidana)을 드러내는데 더 분명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육입을 제외시겼다는

주석서의 설명이다.

 

-주석서와 복주서의 해당 부분을 직역하면...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여섯 감각장소(六入)를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다.’라고 설하게 되면

눈의 감각접촉 등 여섯 가지의 과보로 나타난 감각접촉 만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 [본경]에서는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하여라는

이런 구문을 취하거나 취하지 않거나 간에

조건이 일어남의 특별함과

여섯 감각장소 이외에도 감각접촉의 남은 조건의 특별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라는 구문을 생략하여]

이렇게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알아야 한다.

그러면 이런 방법으로 세존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조건들의 근본원인(nidana)을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이 경은 조건 가운데서 헝클어진 것을 없애고 잡목을 제거한 뒤에 말씀하셨기

때문에 근본원인에 대해 길게 설하신 [](mahanidana, 大因緣)’이라 불리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복주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취하거나라는 것은 여섯 가지의 과보로 나타난 감각접촉이다.

취하지 않거나라는 것은 과보로 나타난 감각접촉이 아닌

유익하거나 해롭거나 작용만 하는 감각접촉이다.

이 구문은 조건이 일어남의 특별함을 보여 주기 위해서와 연결지어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조건의 일어남만이 취착된 것이라는 것을 뜻할 뿐만 아니라

조건도 취착된 것>이란 뜻도 된다.

그래서 안의 감각장소인 여섯 감각장소를 취함에 의해서 취함이라고 만든 뒤

여섯 감각장소 이외에도 감각접촉의 남은 조건의 특별함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라고 설명하였다.

왜냐하면 감각접촉은 눈 등의 여섯 감각장소만의 조건만 되는 것이 아니고,

눈과 형상들을 반연하여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라는

말씀처럼, 형상의 감각장소 등의 물질()과 눈의 알음알이(眼識) 등의 정신

그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눈등의 여섯 감각장소 이외의 남은 [조건인] 전향(轉向) 등처럼

일반적인 것이 아닌 다른 특별한 조건으로서 감각접촉 등이 있어

세존께서 여기정신·물질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이해해야 한다.

[위방가의 아비담마 바자니야]에서 또한 이러한 조건의 [특별함]을 두고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다.”고 설하셨으며

그 주석서에서도 조건의 특별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이고 중요한 근본 원인을 취하기 위해서이다.”라고 주석을 하였다.

 

 

‘‘‘Atthi idappaccayā nāmarūpa’n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ṃ.

‘Kiṃpaccayā nāmarūpa’nti iti ce vadeyya,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nti iccassa vacanīyaṃ.

(8) 아난다여, ‘구체적 조건에 의해서 명색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렇다.’라고 대답해야 한다.‘무엇을 조건으로 명색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 (초불연 주석):  정신(nama, )-느낌, 인식, 상카라들, 알음알이[受想行識]

네 가지 무더기[四蘊]를 뜻하고, 물질(rupa, )- 물질의 무더기()를 의미한다.

청정도론 :“정신(nama, )이란 대상을 향하여 기울기 때문에 느낌 등

세 가지 무더기들을 뜻함.

물질(rupa, )이란 네 가지 근본물질들과

그 네 가지 근본물질에서 파생된 물질들이다.”(XVII.187)라고 정의했다.

 

‘‘Atthi idappaccayā viññāṇa’n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ṃ.

‘Kiṃpaccayā viññāṇa’nti iti ce vadeyya, ‘nāmarūpapaccayā viññāṇa’nti iccassa vacanīyaṃ.

(9) 아난다여, ‘구체적 조건에 의해서 의식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렇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무엇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초불연 주석) 본 대인연경은 식()을 조건으로 다시 명색(名色)을 언급하면서

<식과 명색>의 상호관계로 연기를 설명한다.

본경에서 이런 과정 순서가 됨으로써 12지연기 가운데 무명--육입이 나타나지 않는

9지연기로 연기의 근본(nidana)를 정밀하게 설하고 있다.

 

‘‘Iti kho, ānanda,

nāmarūpapaccayā viññāṇaṃ,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ṃ,

nāmarūpapaccayā phasso,phassapaccayā vedanā, vedanāpaccayā taṇhā,

taṇhāpaccayā upādānaṃ, upādānapaccayā bhavo,bhavapaccayā jāti,

jātipaccayā 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이와 같이 아난다여,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

명색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생겨난다.

 

****(초불연 주석) 여기까지 9지 연기의 전체 골격을 드러내고 이후

연기의 정형구 각각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전개된다.

 

**1.늙음.죽음(jarāmaraṇa) <--2.태어남(Jāti) <--3.존재(.Bhava) <-- 4.집착(Upādāna)

 

[[ 몽둥이와 칼을 들고 싸움, 다툼, 언쟁, 불화, 거짓말, 이간질, 수많은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

<--지킴(ārakkho)<--인색(macchariya)<--소유(pariggaha)<-- 탐착(ajjhosāna)<--욕망과 탐욕(chandaräga) <-- 결정(vinicchayo) <-- 획득(lābha) <---추구(pariyesanā) ]]

 

<-- 5.갈애(Taṇhā) <-- 6.느낌(Vedanā) <--7.접촉(Phassa)

[[色身(rūpakāye).命名觸 (adhivacanasamphasso)/名身(nāmakāye).有對觸 (paṭighasamphasso)]]

 

<---8.명색(Nāmarūpa) <---- 互然 ---> 9.의식(Viññāṇ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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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ātipaccayā jarāmaraṇa’n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jātipaccayā jarāmaraṇaṃ.

Jāti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eyyathidaṃ devānaṃ vā devattāya, gandhabbānaṃ vā gandhabbattāya,

yakkhānaṃ vā yakkhattāya, bhūtānaṃ vā bhūtattāya, manussānaṃ vā manussattāya, catuppadānaṃ vā catuppadattāya, pakkhīnaṃ vā pakkhittāya,

sarīsapānaṃ vā sarīsapattāya

tesaṃ tesañca hi, ānanda, sattānaṃ tadattāya jāti nābhavissa.

Sabbaso jātiyā asati jātinirodhā api nu kho jarāmaraṇaṃ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jarāmaraṇassa, yadidaṃ jāti’’.

 

4. 아난다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있다.’라고 말했지만,

다음과 같은 이치에 따라서 어떻게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떠한 자 모두에게 완전히 일체 태어남이 없다면,

예를 들어 아난다여, 신들이 신으로 879), 건달바들이 건달바880), 야차(약카)들이

야차881), 존재(정령)들이 존재882), 사람들이 사람으로, 네 발 달린 짐승이

네 발 달린 짐승으로 새들이 새로, 뱀들이 뱀으로, 그와 같은 뭇삶들에게 태어남이 없어서,

일체의 태어남이 없게 되어, 태어남이 소멸하여도 늙고 죽음이 시설될 수 있는가?“

[아난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아난다여, 그러므로 참으로

[늙고 죽음의 그 원인, 그 인연, 그 발생, 그 조건은 바로 태어남]이다.”

 

*****

879) deva : Smv. 498에 따르면, 신들은 재생의 신(upattideva)을 말하는데 복주에 의하면, 네 위대한 왕들의 하늘나라(Catummahirajika devå : 四王天)의 신들에서부터

궁극적인 미세한 물질로 이루어진 신들의 하느님 세계(Alkanitthá deva:色究竟天=有頂天)의 신들을 말한다.

880) gandhabba :범어에서는 간다르바(sk.gandharva), 한역에서는 건달바(乾達)라고 한다.

(nāga)이나 금시조(supaṇṇa)와 아울러 불교와 베다 시대의 민속이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우리말로 건달이라고 하는 말은 여기서 나왔으며, 불교에서는 네 하늘나라 신들의 왕

(四天王]의 지배를 받는 하늘의 음악가들로 신들 가운데 최하층의 신들에 편입되었다.

이들과 짝이 되는 하늘의 여자 음악가는 앗차라(acchara)라고 부르는 요정이다.

수행승이 이 건달바의 세계에 환생하는 것은 불명예로 여겨졌다.

그들의 직접적인 왕은 '동쪽의 하늘나라 신들의 왕(持國天王 : Dhatarattha)'이다.

AN. II 39에 따르면, 이들의 별칭은 '하늘을 나는 자(viharngamā)'이다.

그리고 DN. II 221에 따르면, 이들은 홀로 수행하는 수행승이나 수행녀들을 방해하는 자로서 나타난다. 이 경에서

건달바가 향기와 결합되어 있는 것은 어원적으로 간답바(gandhabba)의 간다(gandha)

향기라는 말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약초나 풀이나 나무의 향기를 먹고 산다. 이 건달바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서적을 참조: Wijesekera, O.H de A, (April, 1945)

[Vedic Gandharva and Pali Gandhabba](Ceylon University Review) vol.no.1

특히 이 건달바는 생물학적 연기에서의 재생(punabbhava)에 대한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MN. II. 156~157'부모가 교합해야 하며 어머니가 경수를 가져야 하며 건달바가 나타나야 한다. 이처럼 세 가지가 모이면 입태가 이루어진다.

( matāpitaro va sannipatitá honti, mata ca utunī hoti, gandhabbo va paccupaţthito hoti : evam tiņņam sannipatā gabbhassa avakkanti hotī ti)라는 말은

생명체가 어떤 종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암수의 교합 적당한 시기(경수 있을 때)

생명현상으로서의 건달바(gandhabba)의 현현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함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에 대하여 상세한 것은 역자의 초기불교의 연기사상362-373 쪽을 참조하라.

 

881) yakkha : 야차(野叉)는 한역에서 약카(yakkha)를 음사한 것이다.

원어 약카는 /yaks(빠르게 움직이다)에서 파생된 명사형이다.

주석서에서는 /yaj(헌공하다)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야차는 비인간(非人間)에 속하는 무리로 아귀보다는 약간 높은 단계의 귀신으로 인간과 건달바(Candhabba) 사이에 있는 존재이다. 영혼이나 유령, 도깨비, 요정, 괴물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경에서 실제로는 초인적이고 신적인 또는 악마적 존재를 의미한다. 신들이나 제석천 또는 사천왕도 모두 야차로 불릴 수 있다. MN. 37을 보라. Ggs. I. 19에 따르면, 부처님조차도 MN. 56에서처럼 때로는 야차라고 불리기도 한다.

 

882) bhūta : 어원적으로 생성된 것 즉, 존재라는 뜻이다.

Smv. 498에 따르면, 어떤 재생된 뭇삶을 말하는데, 복주에 의하면, 네 위대한 왕들의 하늘나라의 남방을 다스리는 비룰라까(Vinalhaka : 增長天)의 권속으로 산이나 들의 숨겨진 보물을 관리하는 꿈반다(Kumbhanda)들을 말한다. 그러나 빠알리어에서 뭇삶은 어원적으로 존재를 의미하는 'sattai'가 있고, 생명 · 유정을 뜻하는 ‘pāna’ 도 있고, 생성된 것이란 의미에서 생물, 귀신을 뜻하는 'bhuta'도 있다.

#(초불연 주석):  ‘정령으로 옮긴 원어는 bhuta 이다.

Bhuta의 기본적인 의미는 존재하는 것, 생긴 것이다.

초기경에서 bhuta는 크게 세 가지 문맥에서 나타난다.

 

1)‘존재하는 것 = 생긴 것, 있는 것 = 진실, 사실의 의미로 쓰인다.

중국에서 여실지견(如實知見)으로 옮긴 단어 가운데 여실(있는그대로)에 해당한다.

[yatha-bhutam]이다. 초기경에 아주 많이 나타나는 표현이다.

2) ‘존재하는 것 = 기본 요소 = ...= 근본물질로 쓰였다.

이것은 사대(四大, 네 가지 근본물질)로 나타나고 있다.

3) 본문에서처럼 존재하는 것 =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으로 특히 유령 등

초자연적인 존재를 뜻하는 경우로도 많이 나타난다. 그래서 정령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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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havapaccayā jātī’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bhavapaccayā jāti.

Bhavo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eyyathidaṃ  kāmabhavo vā rūpabhavo vā arūpabhavo vā,

sabbaso bhave asati bhavanirodhā api nu kho jāti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jātiyā, yadidaṃ bhavo’’.

 

5.[세존] "아난다여,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다.'라고 말했지만, 다음과 같은 이치에 따라서 어떻게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떠한 자 모두에게 완전히 일체 태어남이 없다면, 예를 들어 아난다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의 존재, 미세한 물질계의 존재. 비물질계의 존재>883) 없어서,

일체의 존재가 없게 되어, 존재가 소멸하여도 태어남이 시설될 수 있는가?"

 

[아난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아난다여, 그러므로 참으로

[태어남의 그 원인, 그 인연, 그 발생, 그 조건은 바로 존재이다.]”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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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3) kāmabhavo rūpabhavo arūpabhavo : 한역에서는 삼유(tayo bhava : 三有)라고 한다. 세 가지의 존재란 감각적 욕망계의 존재 (kāmabhava : 欲有) 미세한 물질계의 존재(rūpabhava : 色有) 비물질계의 존재(arūpabhava :無色有)이다.

감각적 욕망계의 존재(欲有)는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인간과 하늘에 사는

거친 신체를 지닌 존재를 의미하고,

미세한 물질계의 존재(色有)는 초선천에서부터 정거천에 이르기까지의 범천계에 사는

청정한 신체를 지닌 존재를 의미하며,

비물질계의 존재(無色有)는 공무변처, 식무변처 등이 있는데 거기에 사는

신체를 갖고 있지 않은 순수한 정신적 존재를 뜻한다.

 

884)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m nidānam esa samudayo esa paccayo jarāmaraṇassa yadidam jāti : Smv.498에 따르면,

<자신의 결과를 위하여 생겨나기 때문에 원인.hetu>이라고 하고,

<받을 수 있도록 결과를 내려놓기 때문에 인연.nidāna>이라고 한다.

<결과가 그것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발생.samudaya>이라고 하고,

<결과가 그것을 조건으로 오기 때문에 조건.paccaya>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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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ādānapaccayā bhavo’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upādānapaccayā bhavo.

Upādānañ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eyyathidaṃ

kāmupādānaṃ vā diṭṭhupādānaṃ vā sīlabbatupādānaṃ vā attavādupādānaṃ vā,

sabbaso upādāne asati upādānanirodhā api nu kho bhavo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bhavassa, yadidaṃ upādānaṃ’’.

 

6. 아난다여,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라고 말했지만,

다음과 같은 이치에 따라서 어떻게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떠한 자 모두에게 완전히 일체 집착이 없다면,[58] 예를 들어 아난다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

실체의 이론에 대한 집착885)과 같은 집착이 없어서,

일체의 집착이 없게 되어, 집착이 소멸하여도 존재가 시설될 수 있는가?"

 

[아난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아난다여, 그러므로 참으로

[존재의 그 원인, 그 인연, 그 발생, 그 조건은바로 집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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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5) kamipadanam vā ditthupadanam vā silabbatupadānam vå attavadipadanam va : 한역에서는 사취(cattarimāni upādānāni : 四取)라고 한다. 여기에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집착(kamupādāna :欲取)

견해에 대한 집착(ditthupādāna : 見取)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silabbatupādāna : 戒禁取) 실체의 이론에 대한 집착(attavadupādāna : 我語取)이 있다.

이 중에 세 번째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이 가장 번역하기 어려운 용어 가운데 하나이다. Sst. 25에서는 의례와 의식이라고 번역하고, Nst 45에서는 '외면적인 계율과 서원'이라고 번역했고, God 26에서는 '도덕적 행위의 계행과 맹세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고 번역했다. 한역에서는 계금(戒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종종 계율과 금계라고 잘못 해석되어 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그것은 잘못 이해된 형식적인 도덕적인 규범과 관계된 것이지 올바른 계행과 관계된 것이 아니다.

Srp. II. 15에 따르면,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은 미신과 터부에의 집착을 뜻하며, 예를 들어 인도에서 사람들이 개나 소 따위가 죽은 뒤에 천상에 태어난다고 믿어서 개나 소처럼 똥을 먹고 풀을 먹으면서 천상에 태어나겠다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좁은 의미로 해석한 것이고 좀 더 넓은 의미로 본다면, Stn. R에서는 자신의 교리나 종교적인 수행 때문에 오만해지는 것이나 다른 교리를 비난함으로써 불필요하게 과시하려는 일반적 경향으로서 규범과 금계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사람이 묻지도 않았는데 남에게 자신의 규범과 금계를 말하고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말한다면,그에 대하여 사람들은 천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Smv. 988에 따르면,‘규범으로 청정해진다, 금계로 청정해진다. 규범과 금계로 청정해진다.'라고 규범에 집착하고, 금계에 집착하고, 규범과 금계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실체의 이론에 대한 집착(我語趣)

'''나의 것을 고집하는 견해(有身見: sakkayaditthi)에 대한 집착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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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ṇhāpaccayā upādāna’n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taṇhāpaccayā upādānaṃ.

Taṇhā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eyyathidaṃ

rūpataṇhā saddataṇhā gandhataṇhā rasataṇhā phoṭṭhabbataṇhā dhammataṇhā,

sabbaso taṇhāya asati taṇhānirodhā api nu kho upādānaṃ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upādānassa, yadidaṃ taṇhā’’.

 

7. [세존] “아난다여,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있다.'라고 말했지만, 다음과 같은 이치에 따라서 어떻게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떠한 자 모두에게 완전히 일체 갈애가 없다면, 예를 들어 아난다여,

형상에 대한 갈애(rūpatanhã :色愛), 소리에 대한 갈애(saddatanhã:聲愛),

냄새에 대한 갈애(gandhatanhã :香愛), 맛에 대한 갈애(rasatanhā:味愛),

감촉에 대한 갈애(potthabbatanhã:觸愛), 사실에 대한 갈애(dhammataṇha:法愛) 886)

없어서, 일체의 갈애가 없게 되어, 갈애가 소멸하여도 집착이 시설될 수 있는가?"

 

[아난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아난다여, 그러므로 참으로

[집착의 그 원인, 그 인연, 그 발생, 그 조건은 바로 갈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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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불연 주석): 여기서는 갈애를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六外處六境)와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래에

<느낌과 감각접촉>에서는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와 관련지어 설명한다.

본경에서는 여섯 감각장소가 중복되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명색육입 육입을 줄여 ‘명색연촉(名色)’으로 설명하기도 한다는 걸 이해할 수 있다.

 

886)rupatanhā saddatanhā gandhatanhā rasatanhā photthabbatanhã dhammatanhã :

한역에서는 육애신(chayime tanhākāyā : 六愛身)이라고 한다.

여섯 가지 감각대상에 대한 갈구나 갈망을 말한다.

여기에는 형상에 대한 갈애(rúpatanhã :色愛) 소리에 대한 갈애(saddatanhã:聲愛)

냄새에 대한 갈애(gandhatanhã : 香愛) 맛에 대한 갈애(rasatanhā:味愛)

감촉에 대한 갈애(potthabbatanhã:獨愛) 사실에 대한 갈애(dhammatartha:法愛)

 

이들은 모두 경험대상인 육경(六境)에 대한 갈애를 뜻하는데, K Seidensticker는 각각

시각대상에의 갈애, 청각대상에의 갈애, 후각대상에의 갈애, 미각대상에의 갈애, 신체대상에의 갈애, 정신대상에의 갈애라고 학문적으로 정확히 번역했다.

(K. Seidensticker, Pali-Buddhismus in Übersetzungen. Breslau, 1911) 여기서

이러한 엄밀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가능한 한 일상어로 번역하려는 의도에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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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edanāpaccayā taṇhā’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vedanāpaccayā taṇhā.

Vedanā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eyyathidaṃ

cakkhusamphassajā vedanā sotasamphassajā vedanā ghānasamphassajā vedanā

jivhāsamphassajā vedanā kāyasamphassajā vedanā manosamphassajā vedanā,

sabbaso vedanāya asati vedanānirodhā api nu kho taṇhā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taṇhāya, yadidaṃ vedanā’’.

 

8. [세존] “아난다여,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라고 말했지만, 다음과 같은 이치에 따라서 어떻게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떠한 자 모두에게 완전히 일체 느낌이 없다면, 예를 들어 아난다여, 887)

시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cakkhusamphassajā vedanā : 眼觸所生受),

청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sotasamphassajā vedana :耳觸所生受),

후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ghanasamphassajā vedanã:鼻觸所生受),

미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jivhasamphassajā vedana:舌觸所生受),

촉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kayasamphassajā vedanã:身觸所生受) ,

정신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manosamphassajā vedana :意觸所生受)887)이 없어서,

일체의 느낌(chayime vedanakaya.六受身)이 없게 되어,

느낌이 소멸하여도 갈애가 시설될 수 있는가?"

[아난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아난다여, 그러므로 참으로

[갈애의 그 원인, 그 인연, 그 발생, 그 조건은 바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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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7)cakkhusamphassajā vedanā, sotasamphassajā vedanā, ghānasampassajā vedanā, kāyasamphassajā vedanā, manosamphassaja vedan:

한역에서는 육수신(chayime vedanākāyā : 六受身)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시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cakkhusamphassaja vedana : 眼觸所生受)

청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sotasamphassajā vedana :耳觸所生受) 후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ghanasamphassajā vedanã:鼻觸所生受) 미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jivhasamphassajā vedana:舌觸所生受) 촉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kayasamphassaja vedanã:身觸所生受) 정신의 접촉에서 생기는 느낌(manosamphassaja vedana :意觸所生受)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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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i kho panetaṃ, ānanda, vedanaṃ paṭicca taṇhā,

taṇhaṃ paṭicca pariyesanā, pariyesanaṃ paṭicca lābho, lābhaṃ paṭicca vinicchayo,

vinicchayaṃ paṭicca chandarāgo, chandarāgaṃ paṭicca ajjhosānaṃ,

ajjhosānaṃ paṭicca pariggaho, pariggahaṃ paṭicca macchariyaṃ,

macchariyaṃ paṭicca ārakkho.

Ārakkhādhikaranaṃ

daṇḍādānasatthādānakalahaviggahavivādatuvaṃtuvaṃpesuññamusāvādā

aneke pāpakā akusalā dhammā sambhavanti.

 

9. [세존] “아난다여, 이와 같이 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888)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추구(pariyesanā) 가 생겨나고,

추구를 조건으로 획득(lābha)889) 생겨나고,

획득을 조건으로 결정(vinicchaya)이 생겨나고,890)

결정을 조건으로 욕망과 탐욕(chandaräga)이 생겨나고,

욕망과 탐욕을 조건으로 탐착(ajjhosāna)이 생겨나고,891)

탐착을 조건으로 소유(pariggaha)892)가 생겨나고,

소유를 조건으로 인색(macchariya)893) 이 생겨나고,

인색을 [59] 조건으로 지킴(ārakkho)894) 이 생겨나고,

지킴을 조건으로 몽둥이와 칼을 들고 싸움, 다툼, 언쟁, 불화, 거짓말, 이간질, 수많은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가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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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불연 주석):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9가지 갈애.

 연기의 구성요소들(各支) 가운데서

생사유전(生死流轉)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이 바로 갈애이다.

그래서 사성제에서도 고의 원인을 밝히는 집성제(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에서

갈애를 괴로움의 원인으로 들고 있다.

갈애는 이처럼 중요한 구성요소이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이러한 갈애가 실제로 전개되는 상황을 9가지로 심도 깊게 설명하고 계시는데

연기를 설명하는 다른 경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본경 특유의 가르침이다.

 

여섯 감각장소(六入)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본경의 첫 번째 큰 특징이라면

이것은 두 번째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주석서는 이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윤회의 뿌리가 되는 앞의 갈애를 수연애(受緣愛)’로 설명한 뒤 부터

[말의] 등짝을 때리고 목의 털을 거머쥐고서 용감무쌍하게 길 위로 올라선 사람과 같이

9가지 구문을 통해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갈애의 [모습을] 설하신다.”

 

888) tanhã : Smv. 499에 따르면, 두 가지 종류의 갈애가 있다.

구하는 갈애(esanatanhā)와 구해진 것에 대한 갈애(esitatanhā)이다.

이 두 가지가 일반적인 갈애이다. 그 두 종류는 느낌에 의해서 갈애라고 불린다.

역자주 : 이하의 갈애를 조건으로 추구가 생겨나고, 추구를 조건으로 획득이 생겨나고, 획득을 조건으로 결정이 생겨나고, 결정을 조건으로 욕망과 탐욕이 생겨나고, 욕망과 탐욕을 조건으로 탐착이 생겨나고, 탐착을 조건으로 소유가 생겨나고, 소유를 조건으로 인색이 생겨나고, 인색을 조건으로 지킴이 생겨나고, 지킴을 조건으로 몽둥이와 칼을 들고 싸움, 다툼, 언쟁, 불화, 이간질, 거짓말, 수많은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가 생겨난다.'라는 것은 이 책(DN. I289)에서

'아홉 가지 갈애의 근본이 되는 원리(九愛根本法: nava tanhamailaka dhamma)'라고 불린다.

(초불연 주석):9가지는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갈애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윤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갈애가 어떻게 현실 속에서

실제로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로 중생에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주석서에서는 이것을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갈애라고 표현하고 있다

 

889) labha : Smv. 499에 따르면, 형상 등의 대상을 얻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추구가 있을 때 생겨나기 때문이다.

890) vinicchayo : Smv. 499에 따르면,

-갈애-견해-사유(fiana-tanha-ditthi-vitakka)에 의한 결정을 말한다.

'안락의 결정을 아는 것이 좋다. 안락을 알아서 내심 안락을 실천하라'라고 한다면, 앎에 의한 결정이다.

결정에는 두 종류가 있다. 갈애에 의한 결정과 견해에 의한 결정이다.

108같애로 인한 소행은 갈애에 의한 결정이다. 62견해로 인한 소행은 견해에 의한 결정이다.

'신들의 제왕이여, 욕망은 사유를 인연으로 한다.'라고 하는 경우 사유의 결정이다. 이 경에서는 이것을 의도한 것이다. 이득을 얻어 좋고 나쁨, 아름답고 추함을 사유하여 결정한다.

891) chandarägam paticca ajjhosānam : Smv. 499에 따르면, 욕망과 탐욕은 '약한 탐욕'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Lba IV. 214에서는 그것을 병열복합어로 보아 두 단어로 해석하지 않고 의지적 탐욕이라고 번역했다.

탐착은 Smy. 499에 따르면, '' 또는 '나의 것'이라고 강하게 확신하는 것을 말한다.

892) pariggaha : Smv. 499에 따르면,

갈애와 견해(tanhaditthi)에 의해 움켜쥐는 것을 말한다.

893) macchariya : Smv. 499에 따르면,

타인과의 공유를 참아내지 못하는 것(parehi sadhāranabhavassa asahanata)을 말한다.

894) arakkho : Smv. 500에 따르면, 문을 닫거나 상자에 보관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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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Ārakkhādhikaraṇaṃ [ārakkhaṃ paṭicca ārakkhādhikaraṇaṃ (syā.)]

daṇḍādānasatthādānakalahaviggahavivādatuvaṃtuvaṃpesuññamusāvādā

aneke pāpakā akusalā dhammā sambhavantī’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ārakkhādhikaraṇaṃ

daṇḍādānasatthādānakalahaviggahavivādatuvaṃtuvaṃpesuññamusāvādā

aneke pāpakā akusalā dhammā sambhavanti.

 

Ārakkho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abbaso ārakkhe asati ārakkhanirodhā

api nu kho daṇḍādānasatthādānakalahaviggahavivādatuvaṃtuvaṃpesuññamusāvādā

aneke pāpakā akusalā dhammā sambhaveyyu’’n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daṇḍādānasatthādānakalahaviggahavivādatuvaṃtuvaṃpesuññamusāvādānaṃ

anekesaṃ pāpakānaṃ akusalānaṃ dhammānaṃ sambhavāya yadidaṃ ārakkho.

 

10. 아난다여,

지킴을 조건으로 몽둥이와 칼을 들고 싸움, 다툼, 언쟁, 불화, 이간질, 거짓말,

수많은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가 생겨난다.’라고 했지만, 다음과 같은 이치에 따라서

어떻게 지킴을 조건으로 몽둥이와 칼을 들고

싸움, 다툼, 언쟁, 불화, 이간질, 거짓말, 수많은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가 생겨나는지

알아야 한다.

만약 어떠한 자 모두에게 완전히 일체 지킴이 없다면, 지킴이 없어서,

일체의 지킴이 없게 되어, 지킴이 소멸하여도 몽둥이와 칼을 들고

싸움, 다툼, 언쟁, 불화, 이간질,거짓말,수많은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가 시설될 수 있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참으로 몽둥이와 칼을 들고 싸움, 다툼, 언쟁, 불화, 이간질, 거짓말,

수많은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가 생겨나는 것의 그 원인, 그 인연, 그 발생, 그 조건은 바로 지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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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cchariyaṃ paṭicca ārakkho’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macchariyaṃ paṭicca ārakkho.

Macchariyañ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abbaso macchariye asati macchariyanirodhā api nu kho ārakkho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ārakkhassa,

yadidaṃ macchariyaṃ’’.

 

11. “아난다여, ‘인색을 조건으로 지킴이 있다.’라고 말했지만,

다음과 같은 이치에 따라서 어떻게 인색을 조건으로 지킴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떠한 자 모두에게 완전히 일체의 인색이 없다면,

일체의 인식이 없어서, 인색이 소멸하여도 지킴이 시설될 수 있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참으로

[지킴의 그 원인, 그 인연, 그 발생, 그 조건은 바로 인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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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불연 주석): ‘인색의 원어는 macchariya이다.

주석서는 남의 성공을 견디지 못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 단어를 경이로움을 뜻하는 acchariya에 견주어

이런 경이로움이 내게만 있고 남에게는 없기를(ma).’이라고 한다고 해서

‘ma+acchariya’로 재미있게 풀이하고 있다.

다른 문맥에서는 주로 질투(issa)와 짝을 이루어 issa-macchariya(질투와 인색)

많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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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ggahaṃ paṭicca macchariya’n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pariggahaṃ paṭicca macchariyaṃ.

Pariggaho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abbaso pariggahe asati pariggahanirodhā api nu kho macchariyaṃ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macchariyassa,

yadidaṃ pariggaho’’.

 

12. 아난다여, ‘소유를 조건으로 인색이 있다.’라고 말했지만,

다음과 같은 이치에 따라서 어떻게 소유를 조건으로 인색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떠한 자 모두에게 완전히 일체의 소유가 없다면,

일체의 소유가 없어서, 소유가 소멸하여도 인색이 시설될 수 있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참으로

[인색의 그 원인, 그 인연, 그 발생, 그 조건은 바로 소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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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불연 주석): 거머쥠(소유)수행의 문맥에서는 파악, 파지, 이해의 뜻으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 거머쥠을 뜻한다.

주석서에서는 갈애와 사견으로 거머쥐는 행동이다.”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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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jhosānaṃ paṭicca pariggaho’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ajjhosānaṃ paṭicca pariggaho.

Ajjhosānañ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abbaso ajjhosāne asati ajjhosānanirodhā api nu kho pariggaho paññāyethā’’ti ?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pariggahassa

yadidaṃ ajjhosānaṃ’’.

 

13. 아난다여, ‘탐착을 조건으로 소유가 있다.’라고 말했지만,

다음과 같은 이치에 따라서 어떻게 탐착을 조건으로 소유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떠한 자 모두에게 완전히 일체의 탐착이 없다면,

일체의 탐착이 없어서, 탐착이 소멸하여도 소유가 시설될 수 있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참으로

[소유의 그 원인, 그 인연, 그 발생, 그 조건은 바로 탐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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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ndarāgaṃ paṭicca ajjhosāna’n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chandarāgaṃ paṭicca ajjhosānaṃ.

Chandarāgo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abbaso chandarāge asati chandarāganirodhā api nu kho ajjhosānaṃ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ajjhosānassa,

yadidaṃ chandarāgo’’.

 

14. 아난다여, ‘욕망과 탐욕을 조건으로 탐착이 있다.’라고 말했지만,

다음과 같은 이치에 따라서 어떻게 욕망과 탐욕을 조건으로 탐착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떠한 자 모두에게 완전히 일체의 욕망과 탐욕이 없다면,

일체의 욕망과 탐욕이 없어서, 욕망과 탐욕이 소멸하여도 탐착이 시설될 수 있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참으로

[탐착의 그 원인, 그 인연, 그 발생, 그 조건은 바로 욕망과 탐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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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Vinicchayaṃ paṭicca chandarāgo’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vinicchayaṃ paṭicca chandarāgo.

Vinicchayo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abbaso vinicchaye asati vinicchayanirodhā api nu kho chandarāgo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chandarāgassa,

yadidaṃ vinicchayo’’.

 

15. 아난다여, ‘결정을 조건으로 욕망과 탐욕이 있다.’라고 말했지만,

다음과 같은 이치에 따라서 어떻게 결정을 조건으로 욕망과 탐욕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떠한 자 모두에게 완전히 일체의 결정이 없다면,

일체의 결정이 없어서, 결정이 소멸하여도 욕망과 탐욕이 시설될 수 있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참으로

[욕망과 탐욕의 그 원인, 그 인연, 그 발생, 그 조건은 바로 결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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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Lābhaṃ paṭicca vinicchayo’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lābhaṃ paṭicca vinicchayo.

Lābho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abbaso lābhe asati lābhanirodhā api nu kho vinicchayo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vinicchayassa, yadidaṃ lābho’’.

 

16. “아난다여, ‘획득을 조건으로 결정이 있다.’라고 말했지만,

다음과 같은 이치에 따라서 어떻게 획득을 조건으로 결정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떠한 자 모두에게 완전히 일체의 획득이 없다면,

일체의 획득이 없어서, 획득이 소멸하여도 결정이 시설될 수 있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참으로

[결정의 그 원인, 그 인연, 그 발생, 그 조건은 바로 획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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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Pariyesanaṃ paṭicca lābho’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pariyesanaṃ paṭicca lābho.

Pariyesanā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abbaso pariyesanāya asati pariyesanānirodhā api nu kho lābho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lābhassa, yadidaṃ pariyesanā’’.

 

17. 아난다여, ‘추구를 조건으로 획들이 있다.’라고 말했지만,

다음과 같은 이치에 따라서 어떻게 추구를 조건으로 획득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떠한 자 모두에게 완전히 일체의 추구가 없다면,

일체의 추구가 없어서, 추구가 소멸하여도 획득이 시설될 수 있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참으로

[획득의 그 원인, 그 인연, 그 발생, 그 조건은 바로 추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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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Taṇhaṃ paṭicca pariyesanā’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taṇhaṃ paṭicca pariyesanā.

Taṇhā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eyyathidaṃ kāmataṇhā bhavataṇhā vibhavataṇhā,

sabbaso taṇhāya asati taṇhānirodhā api nu kho pariyesanā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pariyesanāya,

yadidaṃ taṇhā. Iti kho, ānanda, ime dve dhammā dvayena vedanāya ekasamosaraṇā bhavanti.

 

18. 아난다여, ‘갈애를 조건으로 추구가 있다.’라고 말했지만,

다음과 같은 이치에 따라서 어떻게 갈애를 조건으로 추구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떠한 자 모두에게 완전히 일체의 갈애가 없다면,

일체의 갈애가 없어서, 갈애가 소멸하여도 추구가 시설될 수 있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참으로

추구의 그 원인, 그 인연, 그 발생, 그 조건은 바로 갈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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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아난다여, 그러므로 (, taṇhā)라는 것그것이 구함(, pariyesanā)

요인(要因)이고, 원인(原因)이고, ()이며, (, 조건)’이다.

 

(초불연 주석):  “갈애는 추구하는(esana) 갈애와 추구된(esita) 갈애의 두 가지가 있다.

그 갈애 때문에 양들이 다니는 길과 갈고리를 사용해야만 하는 험난한 길 등을 다니면서

즐길 거리를 찾고 구하는 것을 추구하는 갈애라 한다.

찾았고 구했고 획득한 것들에 대한 갈애가 추구된 갈애이다.

이 두 가지가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갈애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느낌을 조건으로 이러한 두 가지 갈애가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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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id) [Iti kho, ānanda, ime dve dhammā 

dvayena vedanāya ekasamosaraṇā bhavanti’ ]

[아난다여, 이와 같이 두 가지 법들이106) 이처럼 두 가지 부분으로

느낌에 의해서 하나가 된다.]107)

[Kim 주해] 아난다여, 이 같은 두 법들이 두 겹(dvaya)인 수()에 의해

하나로 모이게(=합류하게, 결합하게)’ 된다.

 

106)여기서 두 가지 법(dhamma) 이란

윤회의 뿌리가 되는 갈애 (vattamula-tanha)

바로 위 주해에서 설명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갈애(samudacara-tanha)를 뜻한다.

(DA.j1, 500)

107) 윤회의 뿌리가 되는 갈애와 현실에서 벌어지는 갈애,

둘 모두 여섯 감각장소에서 기인한 느낌을 조건으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갈애는 느낌이라는 하나의 조건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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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Phassapaccayā vedanā’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phassapaccayā vedanā.

Phasso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eyyathidaṃ cakkhusamphasso sotasamphasso ghānasamphasso jivhāsamphasso kāyasamphasso manosamphasso,

sabbaso phasse asati phassanirodhā api nu kho vedanā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vedanāya, yadidaṃ phasso’’.

 

19. [세존] “아난다여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라고 말했지만,

다음과 같은 이치에 따라서 어떻게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약 어떠한 자 모두에게 완전히 일체의 접촉이 없다면, 예를 들어

시각의 접촉(cakkhusamphassa:眼觸), 청각의 접촉(sotasammhassa:耳觸),

후각의 접촉(ghanasamphassa:鼻觸), 미각의 접촉(jivhasamphassa:舌觸),

촉각의 접촉(kayasamphassa :身觸), 정신의 접촉(manosamphassa:意觸)895)없어서,

일체의 접촉이 없게 되어, 접촉이 소멸하여도 느낌이 시설될 수 있는가?“

 

[아난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아난다여, 그러므로 참으로

[느낌의 그 원인, 그 인연, 그 발생, 그 조건은 바로 접촉]이다.”

 

**** 895) chayime phassakaya : 한역에서는 육촉신(六觸身)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시각의 접촉(cakkhusamphassa:眼觸) 청각의 접촉(sotasamphassa :耳觸)

후각의 접촉(ghanasamphassa: 鼻觸) 미각의 접촉(jivhasamphassa :舌觸)

촉각의 접촉(kayasammhassa :身觸) 정신의 접촉(manosamphassa :意觸)이 있다

 

*[Kim번역] 아난다여,

안촉(眼觸), 이촉(耳觸), 비촉(鼻觸), 설촉(舌觸), 신촉(身觸), 의촉(意觸)이라는 촉이

어떤 모든(sabbena sabbaṃ) 온갖 방법으로(sabbathā sabbaṃ,모든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완전히)라도 어느 곳에든(kassaci kimhici,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난다여, ‘촉이 멸하여일체의 촉이 없을 때 ()가 알려질 수 있겠는가?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라는 것그것이 ()

요인(要因)이고, 원인(原因)이고, ()이며, (,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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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Nāmarūpapaccayā phasso’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nāmarūpapaccayā phasso.

Yehi, ānanda, ākārehi yehi liṅgehi yehi nimittehi yehi uddesehi nāmakāyassa paññatti hoti,

tesu ākāresu tesu liṅgesu tesu nimittesu tesu uddesesu asati

api nu kho rūpakāye adhivacanasamphasso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Yehi, ānanda, ākārehi yehi liṅgehi yehi nimittehi yehi uddesehi rūpakāyassa paññatti hoti,

tesu ākāresupe

tesu uddesesu asati api nu kho nāmakāye paṭighasamphasso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Yehi, ānanda, ākārehipe

yehi uddesehi nāmakāyassa ca rūpakāyassa ca paññatti hoti,

tesu ākāresupetesu uddesesu asati api nu kho

adhivacanasamphasso vā paṭighasamphasso vā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Yehi, ānanda, ākārehipe

yehi uddesehi nāmarūpassa paññatti hoti,

tesu ākāresu petesu uddesesu asati api nu kho phasso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phassassa, yadidaṃ nāmarūpaṃ’’.

 

20. [세존] “아난다여,

명색을 조건으로 접촉이 있다.'라고 말했지만,

다음과 같은 이치에 따라서 어떻게 [명색을 조건으로 접촉]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어떠한

*형태에 의해서 *특징에 의해서 *인상에 의해서 *표시에 의해서

[정신]의 몸 (名身.정신적인 몸)이 시설되는데 896)

그러한 형태나 특징이나 인상이나 표시가 없이도 색[물질]의 몸(色身.물질적인 몸)

*명칭과의 접촉(adhivacanasamphassa.命名觸)*897) 시설될 수 있는가?

 

(초불번역)아난다여, 여기 [느낌, 인식, 상카라들, 알음알이의]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에 의해서 정신의 뿌리라는 개념이 생긴다.

그러나 만약 이런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물질의 무리에서 *이름 붙이기*를 통해 생기는 정신의 감각접촉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Kim]아난다여, ‘형태들, 특징들, (), 이미지들때문에 명신()에 관한 개념

있다. 그러한 형태들, 특징들, (), 이미지들이 없을 때 

색신(色身) 명명촉(命名觸) 알려질 수 있겠는가?

 

[아난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아난다여, 어떠한 형태에 의해서 특징에 의해서 인상에 의해서 표시에 의해서

물질적인 몸(色身.rūpakāya)이 시설되는데, 그러한 형태나 특징이나 인상이나 표시가 없이도

정신적인 몸(名身.nāmakāya)*저촉과의 접촉(有對觸.paṭighasamphassa)* 898)

시설될 수 있는가?“

[아난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초불번역)아난다여, 여기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에 의해서 물질의 무리라는 개념이 생긴다.

그러나 만약 이런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신의 무리에서 *부딪힘*을 통해 생기는 [물질의] 감각접촉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Kim]아난다여, ‘형태들, 특징들, (), 이미지들때문에 색신()에 관한

 개념이 있다. 그러한 형태들, 특징들, (), 이미지들이 없을 때

 명신(名身) 유대촉(有對觸) 알려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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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협에서 빠진 구문)‘‘Yehi, ānanda, ākārehipe

yehi uddesehi nāmakāyassa ca rūpakāyassa ca paññatti hoti,

tesu ākāresupetesu uddesesu asati api nu kho

adhivacanasamphasso vā paṭighasamphasso vā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초불번역)"아난다여, 여기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에 의해서 정신의 무리와 물질의 무리라는 개념이 생긴다.

그러나 만약 이런 고유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름 짓기로 얻어지는 [정신의] 감각접촉이나

부딪힘으로 얻어지는 [물질의] 감각접촉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Kim]아난다여, ‘형태들, 특징들, (), 이미지들때문에

 명신(名身) 색신(色身)에 관한 개념이 있다. 그러한

형태들, 특징들, (), 이미지들이 없을 때

명명촉(命名觸)이나 또는 유대촉(有對觸)이 알려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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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 "아난다여, 어떠한 형태에 의해서, 특징에 의해서, 인상에 의해서, 표시에 의해서

명색(名色 nāmarūpa)이 시설되는데,

그러한 형태나 특징이나 인상이나 표시가 없이도 접촉이 시설될 수 있는가?”

[아난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아난다여, 그러므로 참으로

[접촉의 그 원인, 그 인연, 그 발생, 그 조건은 바로 명색이다.]”

 

(초불번역)"아난다여, 여기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에 의해서

정신·물질이라는 개념이 생긴다.

그러나 만약 이런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감각접촉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감각접촉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정신·물질이다.“

 

[Kim]아난다여, ‘형태들, 특징들, (), 이미지들때문에 명색에 관한 개념이 있다.

그러한 형태들, 특징들, (), 이미지들이 없을 때 () 알려질 수 있겠는가?

아난다여, 그러므로 명색이라는 것

그것이 ()요인(要因)이고, 원인(原因)이고, ()이며, (,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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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6) yehi ānanda ākārehi yehi lingehi yehi nimittehi yehi uddesehi nāmakāyassa paññatti hoti : Smv. 5000||따르면,

'형태는 느낌 등이 서로 다른 자신의 본성(sabhāva)을 말하고

특징은 그것만이 두드러져 보이고 다른 것은 은폐된다는 것을 말하고,

'인상'은 지각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표시는 그대로 지시되는 것을 말한다.

Smv. 1023에 따르면, 정신의 몸(nanakaya: 名身)은 정신의 다발

, 느낌·지각·형성·의식을 뜻한다.

 

897) adhivacanasamphassa: Smv, 501에 따르면, 정신과의 접촉(manosamphassa)

말한다.

**(초불연주석)이름붙이기로 옮긴 원어는 adhivacana이다.

이것은 부딪힘으로 옮긴 paṭigha와 더불어 본 문단의 두 가지 핵심 용어이다.

아비담마에서 [adhivacana]는 이름이란 뜻으로 정신[] 즉 수, , , 식의 특징을,

[paṭigha]는 부딪힘이란 뜻으로 물질[]의 특징을 나타낸다.

물질이 있을 때는 반드시 부딪힘이 있지만 물질이 제거되면 부딪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석서에서 부딪힘으로 얻어지는 감각접촉이란

부딪힘을 가진 물질의 무더기[色蘊]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 감각접촉이다.’라고 설명한다.

 

898) paṭighasamphassa: 한역에서는 유대촉(有對獨)이라고 한다.

Smv, 501에 따르면, 충돌이 있는 물질의 다발을 기초로 생겨나는 접촉을 말한다.

, 다섯 가지 감관을 기초로 생겨나는 접촉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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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n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ṃ.

Viññāṇañca hi, ānanda, mātukucchismiṃ na okkamissatha,

api nu kho nāmarūpaṃ mātukucchismiṃ samuccissathā’’ti?

‘‘No hetaṃ, bhante’’.

 

‘Viññāṇañca hi, ānanda, mātukucchismiṃ okkamitvā vokkamissatha,

api nu kho nāmarūpaṃ itthattāya abhinibbattissathā’’ti?

‘‘No hetaṃ, bhante’’.

 

‘‘Viññāṇañca hi, ānanda, daharasseva sato vocchijjissatha kumārakassa vā kumārikāya vā,

api nu kho nāmarūpaṃ vuddhiṃ virūḷhiṃ vepullaṃ āpajjissath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nāmarūpassa

yadidaṃ viññāṇaṃ’’.

 

21. [세존] “아난다여,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있다.'라고 말했지만, [63] 다음과 같은 이치에 따라서 어떻게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있는데, 만약 의식이 모태에 들지 않더라도

명색이 모태에 응결될 수 있겠는가?”

[아난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아난다여, 의식이 모태에 들었으나 빗나갔다면, 그래도 명색이 이러한

상태로 태어날 수 있겠는가?"

[아난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아난다여, 의식이 갓난아이나 어린 남아나 어린 여아일 때에 단절되었다면,

명색이 성장하고 증장하고 성숙할 수 있겠는가?"899)

[아난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아난다여, 그러므로 900)

[참으로 명색의 그 원인, 그 인연, 그 발생, 그 조건은 바로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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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9) api nu kho nāmariraṃ vuddhim virūlhim vepullam raissathāti : Smv, 502에 따르면, '성장하고 증장하고 성숙하는 것은 인생의 초기 · 중기 · 후기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다.

 

900) tasmātihānanda : Smv, 502 503에 따르면, '모태에서 결생할 때에도, 모태에 머물 때에도, 성장하여 10세등이 될 때에도, 의식이 그것의 조건이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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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Nāmarūpapaccayā viññāṇa’n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nāmarūpapaccayā viññāṇaṃ.

Viññāṇañca hi, ānanda, nāmarūpe patiṭṭhaṃ na labhissatha,

api nu kho āyatiṃ jātijarāmaraṇaṃ dukkhasamudayasambhavo

jātijarāmaraṇa dukkhasamudayasambhavo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viññāṇassa yadidaṃ nāmarūpaṃ.

 

Ettāvatā kho, ānanda, jāyetha vā jīyetha vā mīyetha vā

cavetha vā upapajjetha vā.

Ettāvatā adhivacanapatho, ettāvatā niruttipatho, ettāvatā paññattipatho,

ettāvatā paññāvacaraṃ, ettāvatā vaṭṭaṃ vattati itthattaṃ paññāpanāya

yadidaṃ nāmarūpaṃ saha viññāṇena aññamaññapaccayatā pavattati.

 

22. 아난다여,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다.’라고 말했지만,

다음과 같은 이치에 따라서 어떻게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의식이 명색에 확립되지 않는다면,

그렇더라도 미래에 태어나고 늙고 죽는 괴로움의 발생과 생성이 시설될 수 있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참으로 의식의 그 원인, 그 인연, 그 발생, 그 조건은 바로 명색이다.”

 

[세존] “아난다여, 참으로 명색이 의식과 함께 서로 조건이 되는 경우,901)

이와 같이 해서 태어나서, 늙거나, 죽거나, 사멸하거나 다시 태어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명칭의 길이 전개되고, 902) 이와 같이 해서 어원의 길이 전개되고,903)

이와 같이 해서 표현의 길이 전개되고, 904) 이와 같이 해서 지혜의 영역이 전개된다.905)이와 같이 해서[64] 유전하는 존재의 상태가 시설되기 위해 전개된다.”906)

 

(초불연)아난다여, 이와 같이 하여 태어나고, 늙고, 죽고, 죽어서는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알음알이와 정신 · 물질의 상호 조건]에 의해 이름짓는 토대가 생기고,

어원에 입각한 언어의 토대가 생기고, 개념을 얻는 토대가 생기고통찰자의 영역이 생기며,

이 알음알이와 정신 · 물질의 상호 조건에 의해 [윤회는] 전개되는 것이다.

정신 ·물질은 알음알이와 더불어 [오온의] 이러한 상태를 천명하기 위한 것이다."

 

*****

901) yadidam nāmarūpam saha viññāmena aññamaññapaccayatāya pavattati :

Smv. 503에 따르면, 의식이 명색의 조건이 되고, 명색이 의식의 조건이 되어

두 가지가 상호조건에 의해서 생기하는 경우를 말한다.

 

902) ettavata adhivacanagatho : Smv. 503에 따르면, 명칭의 길은 명예를 증가시키거나 재물을 증가 등의 의미가 아니라 단지 언어와 관계하여 일어나는 언설의 길(vohiaatha)을 말하는데, 여기서 길이라는 것은 발생영역(pavattiya visaya)을 말한다.

 

이름을 얻는 길(명칭의 길, adhivacana-patha)이란

시리왓다까, 다나왓다까 등이

[길상을 증장시키는 사람, 재산을 증장시키는 사람 이라는] 뜻을 보여주지 않고

단지 단어(vacana)만 드러내는 인습적 표현(vohāra)의 길이다.

 

언어표현을 얻는 길(어원의 길, nirutṭ-patha)이란

마음 챙긴다고 해서 마음챙김이라 하고, 알아차린다고 해서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등의

[명칭을 가지게 되는] 이유를 진술함에 의해서 드러내는 인습적 표현의 길이다.

 

개념을 얻는 길(표현의 길, paññatti-patha)이란 [현명한 사람에 관계된] 빤디따, 뱟따, 메다위, 니뿌나 등의 [단어를] 여러 측면에서 그 뜻을 알게 함(ñapana)에 의해서 드러내는 인습적 표현의 길이다.

 

통찰지의 영역(= 지혜의 영역, paññāvacara)이란 통찰지로써 고찰해야 한다.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통찰지로써 드러내어야 한다. 알아져야 한다는 뜻이다.

 

903) ettāvatā niruttipatho : Smv. 503-504에 따르면, 어원의 길기억하기 때문에

새김을 갖춘 자이다.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자이다.'는 등의

근거(karana)와 이유(anadesa)를 통해서 일어나는 언설의 길을 말한다.

 

904) ettāvata paññattipatho : Smv. 504에 따르면, 표현의 길은 현자 · 총명한 자 ·

유능한 자 · 지혜로운 자 · 논쟁하는 자 등의 여러 가지 알려진 것에 따라서 일어나는

언설의 길을 말한다.

 

905) ettavata paññavacaram : Smv, 504에 따르면, 지혜의 영역은 지혜에 의해서

이야기되거나 알려질 수 있는 것을 말한다.

 

906) etāvatá vattam vattati (ettavata) itthattam paññapanaya : '존재의 상태'는 원래

이러한 상태'를 역자가 주석에 따라 번역한 것이다. Smv. 504에 따르면, 여기서 유전은

윤회의 유전(samsaravatta)을 말한다. Dat. II.140에 따르면, 유전에는

오염의 유전(kilesavatta), 업의 유전(kammavatta), 이숙의 유전(vipakavatta)

`세 가지 유전이 있다.

이러한 상태의 시설'이란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khandhapancaka: 五蘊)에 의한 명칭의 시설'을 의미한다.

 

 

 

Attapaññatti (자아를 주장하는 자)

 

117. ‘‘Kittāvatā ca, ānanda,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Rūpiṃ vā hi, ānanda, parit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rūpī me paritto attā’’ti.

Rūpiṃ vā hi, ānanda, anan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rūpī me ananto attā’ti.

Arūpiṃ vā hi, ānanda, parit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arūpī me paritto attā’ti.

Arūpiṃ vā hi, ānanda, anan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arūpī me ananto attā’ti.

 

23. [세존] “아난다여, 또한 자아를 주장하는 자는 어떻게 자아를 시설하는가?

 

1) 아난다여, 자아를 물질을 지닌 유한한 자라고 주장하는 자는

'자아는 물질을 지닌 유한한 자이다.'라고 시설한다. 907)

2) 아난다여, 자아를 물질을 지닌 무한한 자라고 주장하는 자는

'자아는 물질을 지닌 무한한 자이다. 라고 시설한다. 908)

3) 아난다여, 자아를 물질을 여윈 유한한 자라고 주장하는 자는

'자아는 물질을 여윈 유한한 자이다.'라고 시설한다. 909)

4) 아난다여, 자아를 물질을 여윈 무한한 자라고 주장하는 자는

'자아는 물질을 여윈 무한한 자이다.'라고 시설한다.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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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7) rūpim vā hi ānanda parittam attānam paññapento paññapeti 'rūpī me paritto attāti'ti : Smv. 504 확대되지 않은 두루채움(kasiṇa)의 인상을 자아라고 파악하는 자는

물질을 지닌 유한한 자라고 자아를 시설한다.

 

908) rūpim vã hi ānanda anantam attānam paññapento paññapeti 'rūpī me ananto attā'ti : Smv. 504에 따르면 확대된 두루채움의 인상을 자아라고 파악하는 자는

물질을 지닌 무한한 자라고 자아를 시설한다.

 

909) arūpim vā hi ānanda parittam attānam paññapento paññapeti 'arūpī me paritto attā'ti : Smv. 504 확대되지 않은 두루채움의 인상을 제거하고 인상이 접촉된 장소, 또는 거기서 생겨난 네 가지 존재의 다발(四蘊)을 또는 그 가운데 의식()을 자아라고 파악하는 자는 물질을 여윈 유한한 자라고 자아를 시설한다.

 

910) arūpim vā hi ānanda anantam attānam paññapento paññapeti 'arūpī me ananto attā'ti : Smv. 5040 확대된 두루채움의 인상을 제거하고 인상이 접촉된 장소를, 또는

거기서 생겨난 네 가지 존재의 다발(四蘊)을 또는 그 가운데 의식()을 자아라고 파악하는 자는 물질을 여읜 무한한 자라고 자아를 시설한다.

 

[19]여기서 주의해서 봐야 할 점은 이런 문자 풀처럼 얽히고 설킨

윤회의 전개의 중심에는 바로 자아(atta)’가 있다는 점이다.

선정, 삼매, 신통이 아무리 자유자재하더라도 자아라는 개념을 해체하지 못하는 한

그는 결코 성자가 아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자아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허무주의가 아니냐?’고 회의하고

두려워할지도 모른다.

거기에 대한 대답이 바로 본경의 주제인 연기이다. 자아가 없다는 말은 연기한다는 말이다.

여러 조건들이 서로 일어나고 사라지고 뭉치고 흩어지고 하면서 흘러가는 것이

연기의 실상이다. 이것이 바로 무아다.

그러므로 연기를 꿰뚫지 못하는 한 자아의 개념은 척파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본경에서도 심오한 연기의 가르침의 결론으로 자아개념의 척파를 설하신다.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자아란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오온들을

나라거나 내 것이라고 취착할 수 있지만 이러한 오온들은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서로 부딪혀서 만들어내는 물안개와 물보라와 같은 개념적 존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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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Tatrānanda, yo so rūpiṃ parit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Etarahi vā so rūpiṃ parit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tattha bhāviṃ vā so rūpiṃ parit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atathaṃ vā pana santaṃ tathattāya upakappessāmī’ti iti vā panassa hoti.

Evaṃ santaṃ kho, ānanda, rūpiṃ [rūpī (ka.)] parittattānudiṭṭhi anusetīti iccālaṃ vacanāya

 

24. 아난다여, 그 가운데 911)

자아를 물질을 지닌 유한한 자라고 주장하는 자는

현세에서912) 자아를 '물질을 지닌 유한한 자이다.'라고 주장하며 시설한다.

혹은 그는 저 세상에서913) 자아를 '물질을 지닌 유한한 자이다.'라고 주장하며 시설한다.

혹은 또한 그는 '그렇지 않더라도, 그러한 상태로 될 것이다.'고 생각한다. 914)

아난다여, 그렇다면,

그는 '자아는 물질을 지닌 유한한 자이다.'라는 견해에 묶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911) tatranānda : Smv. 504에 따르면, 그 가운데에서'라는 것은 위의 네 가지 견해 가운데라는 뜻이다.

912) etarahi va : Smv, 504에 따르면, ‘현재에서' 라는 뜻이다. 지금만이 있고 지금과 다른 것이 없다. 이것은 허무주의(uccheda)에 의해서 말해진 것이다.

 

913) tattha bhāviṃ vā : Smv, 504에 따르면, ‘혹은 미래의'라는 뜻이다.

이것은 영원주의(sassata)에 의해서 말해진것이다.

 

914) atatham vā pana santam tathattāya upakappessārī ti iti vā panassa hoti :

Smv. 504에 따르면 허무주의자는 영원주의자에게 허무주의만을 지지하겠지.'라고 생각하고

영원주의자는 허무주의자에게 '영원주의만을 지지하겠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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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trānanda, yo so rūpiṃ anan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Etarahi vā so rūpiṃ anan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tattha bhāviṃ vā so rūpiṃ anan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atathaṃ vā pana santaṃ tathattāya upakappessāmī’ti iti vā panassa hoti.

Evaṃ santaṃ kho, ānanda, rūpiṃ [rūpī (ka.)] anantattānudiṭṭhi anusetīti iccālaṃ vacanāya.

 

25. 아난다여, 그 가운데 자아를 물질을 지닌 무한한 자라고 주장하는 자는

현세에서의 자아를 물질을 지닌 무한한 자이다.’라고 주장하며 시설한다.

혹은 그는 저 세상에서의 자아를 물질을 지닌 무한한 자이다.’라고 주장하며 시설한다.

혹은 그는 그렇지 않더라도, 그러한 상태로 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아난다여, 그렇다면, 그는 자아는 물질을 지닌 무한한 자이다.’라는 견해에 묶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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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trānanda, yo so arūpiṃ parit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Etarahi vā so arūpiṃ parit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tattha bhāviṃ vā so arūpiṃ parit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atathaṃ vā pana santaṃ tathattāya upakappessāmī’ti iti vā panassa hoti.

Evaṃ santaṃ kho, ānanda, arūpiṃ [arūpī (ka.)] parittattānudiṭṭhi anusetīti

iccālaṃ vacanāya.

 

26. 아난다여, 그 가운데 자아를 물질을 여읜 유한한 자라고 주장하는 자는

현세에서의 자아를 물질을 여읜 유한한 자이다.’라고 주장하며 시설한다.

혹은 그는 저 세상에서의 자아를 물질을 여읜 유한한 자이다.’라고 주장하며 시설한다.

혹은 그는 그렇지 않더라도, 그러한 상태로 될 것이다.’고 생각한다.

아난다여, 그렇다면, 그는 자아는 물질을 여읜 유한한 자이다.’라는 견해에 묶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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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trānanda, yo so arūpiṃ anan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Etarahi vā so arūpiṃ anan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tattha bhāviṃ vā so arūpiṃ anan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atathaṃ vā pana santaṃ tathattāya upakappessāmī’ti iti vā panassa hoti.

Evaṃ santaṃ kho, ānanda, arūpiṃ [arūpī (ka.)] anantattānudiṭṭhi anusetīti

iccālaṃ vacanāya.

Ettāvatā kho, ānanda,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27. 아난다여, 그 가운데 자아를 물질을 여읜 무한한 자라고 주장하는 자는

현세에서의 자아를 물질을 여읜 무한한 자이다.’라고 주장하며 시설한다.

혹은 그는 저 세상에서의 자아를 물질을 여읜 무한한 자이다.’라고 주장하며 시설한다.

혹은 그는 그렇지 않더라도, 그러한 상태로 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아난다여, 그렇다면, 그는 자아를 물질을 여읜 무한한 자이다.’라는 견해에 묶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난다여, 자아를 주장하는 자는 이와 같이 자아를 시설한다.”

 

 

Naattapaññatti (자아를 주장하지 않는 자)

 

119. ‘‘Kittāvatā ca, ānanda,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Rūpiṃ vā hi, ānanda, parit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rūpī me paritto attā’ti.

Rūpiṃ vā hi, ānanda, anan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rūpī me ananto attā’ti.

Arūpiṃ vā hi, ānanda, parit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arūpī me paritto attā’ti.

Arūpiṃ vā hi, ānanda, anan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arūpī me ananto attā’ti.

 

28. [세존] “아난다여, 또한 자아를 주장하지 않는 자는915) 어떻게 자아를 시설하지 않는가?

 

1) 아난다여, 자아를 물질을 지닌 유한한 자라고 주장하지 않는 자는

자아는 물질을 지닌 유한한 자이다.’라고 시설하지 않는다.

2) 아난다여, 자아를 물질을 지닌 무한한 자라고 주장하지 않는 자는

자아는 물질을 지닌 무한한 자이다.’라고 시설하지 않는다.

3) 아난다여, 자아를 물질을 여읜 유한한 자라고 주장하지 않는 자는

자아는 물질을 여읜 유한한 자이다.’라고 시설하지 않는다.

4) 아난다여, 자아를 물질을 여읜 무한한 자라고 주장하지 않는 자는

자아는 물질을 여읜 무한한 자이다.’라고 시설하지 않는다.

 

915) atānam na paiiapento : Smv, 505에 따르면, 모든 고귀한 사람(ariyapuggala)을 말한다. 많이 배운 삼장(三藏)을 배운 자, 이장(二藏)을 배운 자, 일장(一藏)을 배운 자, 또는 한 니까야라도 잘 결정하여 배운 자, 또는 통찰하여 노력하는 자는 자아를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유사한 두루채움에 관해서는 '유사한 두루채움이다.'라는 통찰이 있고 물질을 여윈 존재의 다발에 관해서는 물질을 여읜 존재의 다발이다.'라는 통찰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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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Tatrānanda, yo so rūpiṃ parit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Etarahi vā so rūpiṃ parit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tattha bhāviṃ vā so rūpiṃ parit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atathaṃ vā pana santaṃ tathattāya upakappessāmī’ti iti vā panassa na hoti.

Evaṃ santaṃ kho, ānanda, rūpiṃ parittattānudiṭṭhi nānusetīti iccālaṃ vacanāya.

 

29. 아난다여, 그 가운데 자아를 물질을 지닌 유한한 자라고 주장하지 않는 자는

현세에서의 자아는 '물질을 지닌 유한한 자이다. 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시설하지 않는다.

혹은 그는 저 세상에서의 자아는 물질을 지닌 유한한 자이다.'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시설하지 않는다. 혹은 그는 '그렇지 않더라도, 그러한 상태가 될 것이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그렇다면, 그는 '자아는 물질을 지닌 유한한 자이다.’라는 견해에 묶여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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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trānanda, yo so rūpiṃ anan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Etarahi vā so rūpiṃ anan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tattha bhāviṃ vā so rūpiṃ anan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atathaṃ vā pana santaṃ tathattāya upakappessāmī’ti iti vā panassa na hoti.

Evaṃ santaṃ kho, ānanda, rūpiṃ anantattānudiṭṭhi nānusetīti iccālaṃ vacanāya.

 

30. 아난다여, 그 가운데 자아를 물질을 지닌 무한한 자라고 주장하지 않는 자는

현세에서의 자아는 물질을 지닌 무한한 자이다.’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시설하지 않는다.

혹은 그는 저 세상에서의 자아는 물질을 지닌 무한한 자이다.’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시설하지 않는다.

혹은 그는 그렇지 않더라도, 그러한 상태가 될 것이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그렇다면, 그는 자아는 물질을 지닌 무한한 자이다.’라는 견해에 묶여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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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trānanda, yo so arūpiṃ parit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Etarahi vā so arūpiṃ parit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tattha bhāviṃ vā so arūpiṃ parit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atathaṃ vā pana santaṃ tathattāya upakappessāmī’ti iti vā panassa na hoti.

Evaṃ santaṃ kho, ānanda, arūpiṃ parittattānudiṭṭhi nānusetīti iccālaṃ vacanāya.

 

31. 아난다여, 그 가운데 자아를 물질을 여읜 유한한 자라고 주장하지 않는 자는

현세에서의 자아는 물질을 여읜 유한한 자이다.’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시설하지 않는다.

혹은 저 세상에서의 자아는 물질을 여읜 유한한 자이다.’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시설하지 않는다.

혹은 그는 그렇지 않더라도, 그러한 상태가 될 것이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그렇다면 그는 자아는 물질을 여읜 유한한 자이다.’라는 견해에 묶여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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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trānanda, yo so arūpiṃ anan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Etarahi vā so arūpiṃ anan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tattha bhāviṃ vā so arūpiṃ anan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atathaṃ vā pana santaṃ tathattāya upakappessāmī’ti iti vā panassa na hoti.

Evaṃ santaṃ kho, ānanda, arūpiṃ anantattānudiṭṭhi nānusetīti iccālaṃ vacanāya.

 

Ettāvatā kho, ānanda,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32. 아난다여, 그 가운데 자아를 물질을 여읜 무한한 자라고 주장하지 않는 자는

현세에서의 자아는 물질을 여읜 무한한 자이다.’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시설하지 않는다.

혹은 그는 저 세상에서 자아는 물질을 여읜 무한한 자이다.’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시설하지 않는다.

혹은 그는 그렇지 않더라도, 그러한 상태가 될 것이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그렇다면, 그는 자아는 물질을 여읜 무한한 자이다.’라는 견해에 묶여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아난다여, 자아를 주장하지 않는 자는 이와 같이 자아를 시설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여기서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자아를 천명하지 않는 자는

지금 현재에서 그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자아를 천명하지 않거나

'비록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다음 생에는] 그러한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다음 생에는 그러한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다음 생에서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자아를 천명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그렇기 때문에 물질을 가지지 않은 [자아를 천명 하지 않는] 자에게는

무한한 자아라는 견해가 결코 잠재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아난다여, [성자들은] 이렇게 천명하지 않으면서 자아를 천명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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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tasamanupassanā (자아를 인식하는 자)

 

121. ‘‘Kittāvatā ca, ānanda, attānaṃ samanupassamāno samanupassati?

Vedanaṃ vā hi, ānanda, attānaṃ samanupassamāno samanupassati

‘vedanā me attā’ti.

‘Na heva kho me vedanā attā, appaṭisaṃvedano me attā’ti iti vā hi,

ānanda, attānaṃ samanupassamāno samanupassati.

‘Na heva kho me vedanā attā, nopi appaṭisaṃvedano me attā, attā me vediyati,

vedanādhammo hi me attā’ti iti vā hi, ānanda, attānaṃ samanupassamāno samanupassati.

 

33.[세존] “아난다여, 또한 916) 자아를 인식하는 자는 어떻게 자아를 인식하는가?

아난다여, 느낌에 관한 한,917) 자아라고 인식하는 자는

'느낌이야말로 나의 자아이다.'라고 인식하거나,

혹은 아난다여, 자아를 인식하는 자는

느낌이야말로 나의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껴지지 않는다.'라고918) 인식하거나.

혹은 아난다여, 자아를 인식하는 자는

'느낌이야말로 나의 자아가 아니다. 그러나 나의 자아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껴진다. 나의 자아는 느낌의 원리를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919) 인식한다.

 

*****

(초불번역)아난다여, 느낌을 관찰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아를 관찰한다.

"느낌은 나의 자아다."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껴지지 않는다."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그러나 나의 자아는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낀다. 나의 자아는 (*느끼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라고.

아난다여, [사람들은] 이와 같이 관찰하면서 자아를 관찰한다.

 

916) ca ānanda : Smv, 505에 따르면, 이상과 같이 자아를 주장하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교시한 뒤에 자아를 인식하는 자들에 대하여 시설한다.

여기서 그들은 사견에 의해서 자아를 인식하고 시설한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의 인식은

20가지 개체가 있다는 견해(sakkāyadiṭṭhi : 有身見)를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그 20가지 개체가 있다는 견해를 가르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서 20가지 개체가 있다는 견해란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五蘊)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 방식으로 자아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 : 1) 물질을 자아로 여기고 , 2)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3)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고, 4)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는 것,

느낌을 자아로 여기고, 느낌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느낌이 있다고 여기고, 느낌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는 것,

지각을 자아로 여기고, 지각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지각이 있다고 여기고, 지각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는 것,

형성을 자아로 여기고, 형성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형성이 있다고 여기고, 형성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는 것,

의식을 자아로 여기고, 의식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의식이 있다고 여기고, 의식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는 것을 말한다.

 

917) vedanaṃ : Smv. 505에 따르면, 이것은

느낌의 다발을 기초로 하는 개체가 있다는 견해(sakkayaditthi : 有身見)를 말한다.

 

918) na heva kho me vedana atta, appatisamvedano me attati : Smv. 505에 따르면, 이것은 물질의 다발을 기초로 하는 개체가 있다는 견해(sakkayaditthi : 有身見)를 말한다.

 

919) na heva kho me vedanā attā, no'pi appațisamvedano me attā, attā me vedayati vedanādhammo hi meatta'ti : Smv, 505에 따르면, 이것은 느낌의 다발, 지각의 다발, 형성의 다발, 의식의 다발을 기초로 하는 개체가 있다는 견해(sakkayaditthi : 有身見)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세 가지 다발은 느낌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느껴지고, 또한 그 다발에는 느낌이라고 하는 원리가 있으며, 분리되지 않는 자신의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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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Tatrānanda, yo so evamāha ‘vedanā me attā’ti, so evamassa vacanīyo

‘tisso kho imā, āvuso, vedanā sukhā vedanā dukkhā vedanā adukkhamasukhā vedanā.

Imāsaṃ kho tvaṃ tissannaṃ vedanānaṃ katamaṃ attato samanupassasī’ti?

Yasmiṃ, ānanda, samaye sukhaṃ vedanaṃ vedeti, neva tasmiṃ samaye dukkhaṃ vedanaṃ vedeti,

na adukkhamasukhaṃ vedanaṃ vedeti; sukhaṃyeva tasmiṃ samaye vedanaṃ vedeti.

Yasmiṃ, ānanda, samaye dukkhaṃ vedanaṃ vedeti, neva tasmiṃ samaye sukhaṃ vedanaṃ vedeti,

na adukkhamasukhaṃ vedanaṃ vedeti; dukkhaṃyeva tasmiṃ samaye vedanaṃ vedeti.

Yasmiṃ, ānanda, samaye adukkhamasukhaṃ vedanaṃ vedeti,

neva tasmiṃ samaye sukhaṃ vedanaṃ vedeti,

na dukkhaṃ vedanaṃ vedeti; adukkhamasukhaṃyeva tasmiṃ samaye vedanaṃ vedeti.

 

34. 아난다여, 그런데 느낌이야말로 나의 자아이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와 같이

벗이여, 이러한 세 가지 느낌,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있는데,

그러한 세 가지 느낌 가운데 어떠한 것을 자아라고 인식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아난다여,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는 괴로운 느낌은 느껴지지 않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느껴지지 않고 오로지 즐거운 느낌만 느껴진다.

아난다여, 괴로운 느낌을 느낄 때는 즐거운 느낌은 느껴지지 않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느껴지지 않고 오로지 괴로운 느낌만 느껴진다.

아난다여,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느낄 때에는 즐거운 느낌도 느껴지지 않고,

괴로운 느낌도 느껴지지 않고 오로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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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Sukhāpi kho, ānanda, vedanā aniccā saṅkhatā paṭiccasamuppannā

khayadhammā vayadhammā virāgadhammā nirodhadhammā.

Dukkhāpi kho, ānanda, vedanā aniccā saṅkhatā paṭiccasamuppannā

khayadhammā vayadhammā virāgadhammā nirodhadhammā.

Adukkhamasukhāpi kho, ānanda, vedanā aniccā saṅkhatā paṭiccasamuppannā

khayadhammā vayadhammā virāgadhammā nirodhadhammā.

Tassa sukhaṃ vedanaṃ vediyamānassa ‘eso me attā’ti hoti.

Tassāyeva sukhāya vedanāya nirodhā ‘byagā [byaggā (sī. ka.)] me attā’ti hoti.

Dukkhaṃ vedanaṃ vediyamānassa ‘eso me attā’ti hoti.

Tassāyeva dukkhāya vedanāya nirodhā ‘byagā me attā’ti hoti.

Adukkhamasukhaṃ vedanaṃ vediyamānassa ‘eso me attā’ti hoti.

Tassāyeva adukkhamasukhāya vedanāya nirodhā ‘byagā me attā’ti hoti.

Iti so diṭṭheva dhamme aniccasukhadukkhavokiṇṇaṃ uppādavayadhammaṃ

attānaṃ samanupassamāno samanupassati, yo so evamāha ‘vedanā me attā’ti.

Tasmātihānanda, etena petaṃ nakkhamati ‘vedanā me attā’ti samanupassituṃ.

 

35. 아난다여, 즐거운 느낌도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조건적으로 발생된 것이고

부서지는 것이고 사라져야 하는 것이고 소멸되고야 마는 것이다.

아난다여, 괴로운 느낌도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조건적으로 발생된 것이고

부서지는 것이고 사라져야 하는 것이고 소멸되고야 마는 것이다.

아난다여,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조건적으로 발생된 것이고

부서지는 것이고 사라져야 하는 것이고 소멸되고야 마는 것이다.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즐거운 느낌이 사라지면, ‘나의 자아는 사라졌다.’라고 생각해야 한다.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서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괴로운 느낌이 사라지면, ‘나의 자아는 사라졌다.’라고 생각해야 한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사라지면,

나의 자아는 사라졌다.’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와 같이 느낌이야말로 나의 자아이다.’라고 인식하는 자는 현세에서 무상하고 즐겁거나 괴로움이 섞여있고 생성과 소멸의 원리를 자아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느낌이야말로 나의 자아이다.’라고 인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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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Tatrānanda, yo so evamāha ‘na heva kho me vedanā attā,

appaṭisaṃvedano me attā’ti,

so evamassa vacanīyo ‘yattha panāvuso, sabbaso vedayitaṃ natthi api nu kho,

tattha ‘‘ayamahamasmī’’ti siy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tena petaṃ nakkhamati ‘na heva kho me vedanā attā,

appaṭisaṃvedano me attā’ti samanupassituṃ.

 

36. 아난다여, 그런데 느낌이야말로 나의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껴지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와 같이 '벗이여, 일체 느껴지는 것이 없을 때, '이것이 나이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아난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920)

아난다여, 그러므로 느낌이야말로 나의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껴지지 않는다.‘라고 인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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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 no hetam bhante : 여기서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약간 어색하지만, 아난다가 제삼자에 대한 물음에 끼어든것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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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Tatrānanda, yo so evamāha ‘na heva kho me vedanā attā, nopi appaṭisaṃvedano me attā, attā me vediyati, vedanādhammo hi me attā’ti.

So evamassa vacanīyo

vedanā ca hi, āvuso,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aparisesā nirujjheyyuṃ.

Sabbaso vedanāya asati vedanānirodhā api nu kho tattha ‘ayamahamasmī’ti siy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tena petaṃ nakkhamati ‘‘na heva kho me vedanā attā,

nopi appaṭisaṃvedano me attā, attā me vediyati,

vedanādhammo hi me attā’ti samanupassituṃ.

 

- * 원전에 구문 누락(?)* “Tasmātihānanda, etena petaṁ nakkhamati: ‘na heva kho me vedanā attā, appaṭisaṁvedano me attā’ti samanupassituṁ.

 

37. 아난다여, 그런데

느낌이야말로 나의 자아가 아니다. 그러나 나의 자아는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껴진다. 나의 자아는 느껴지는 원리를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와 같이

벗이여, 느낌이 일체 모두 어디서든지 모든 곳에서 남김없이 소멸하여

일체의 느낌이 없어져서 느낌이 소멸하여도 그때 이것이 나이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라고 물어야 한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느낌이야말로 나의 자아가 아니다.

그러나 나의 자아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껴진다.

나의 자아는 느낌의 원리를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인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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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Yato kho, ānanda, bhikkhu neva vedanaṁ attānaṁ samanupassati, nopi appaṭisaṁvedanaṁ attānaṁ samanupassati, nopi ‘attā me vediyati, vedanādhammo hi me attā’ti samanupassati. So evaṁ na samanupassanto na ca kiñci loke upādiyati, anupādiyaṁ na paritassati, aparitassaṁ paccattaññeva parinibbāyati,

‘khīṇā jāti, vusitaṁ brahmacariyaṁ, kataṁ karaṇīyaṁ, nāparaṁ itthattāyā’ti pajānāti.

 

38. 아난다여, 참으로 수행승은 921)

느낌을 나라고 인식하지 않으며, 또한 나를 느낌이라고 인식하지 않으며,

'나의 자아는 느낀다. 나의 자아는 느낌의 원리를 지녔기 때문이다. 라고도

인식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렇게 인식하지 않아서 세상의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까닭에 동요하지 않고 922), 동요하지 않는 까닭에 스스로 완전한 열반에 들어,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 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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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1) yato kho panananda, bhikikhu : Smv, 507에 따르면,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조건의 형태에 대하여 몽매한, 사견을 지닌 자의 이러한 언로를 가지고 윤회를 말한 뒤에, 환멸(還滅:vivaṭṭa)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922) na paritassati : Smv. 508에 따르면, 갈애(taṇha)와 견해(ditṭhi)와 자만(māna)으로 동요하는 것을 말한다.

 

923) paccattam yeva parinibbāyissati. khīņā jāti, vusitam brahmacariyam, katam karaṇīyam nāparam itthattāyā'ti pajanāti : Smv. 508에 따르면, 오염의 완전한 지멸(kilesaparinibbānaa)에 의해서 완전한 열반에 든 자에게는 성찰(paccavekkhaṇā)의 일어남을 보여주기 위해 태어남은 부서졌고'이라고 말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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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aṁ vimuttacittaṁ kho, ānanda, bhikkhuṁ yo evaṁ vadeyya: 

‘hoti tathāgato paraṁ maraṇā itissa diṭṭhī’ti, tadakallaṁ.

‘Na hoti tathāgato paraṁ maraṇā itissa diṭṭhī’ti, tadakallaṁ. 

‘Hoti ca na ca hoti tathāgato paraṁ maraṇā itissa diṭṭhī’ti, tadakallaṁ. 

‘Neva hoti na na hoti tathāgato paraṁ maraṇā itissa diṭṭhī’ti, tadakallaṁ.

Taṁ kissa hetu? 

 

Yāvatā, ānanda, adhivacanaṁ yāvatā adhivacanapatho, yāvatā nirutti yāvatā niruttipatho, yāvatā paññatti yāvatā paññattipatho, yāvatā paññā yāvatā paññāvacaraṁ, yāvatā vaṭṭaṁ, yāvatā vaṭṭati, tadabhiññāvimutto bhikkhu, tadabhiññāvimuttaṁ bhikkhuṁ

‘na jānāti na passati itissa diṭṭhī’ti, tadakallaṁ.

 

39. 아난다여, 이와 같이 마음이 해탈된 수행승에게

그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으며,

그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옳지 않으며,

그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옳지 않으며,

그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옳지 않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어떠한 명칭이 있든지,

어떠한 명칭의 길이 있든지, 어떠한 어원이 있든지, 어떠한 어원의 길이 있든지,

어떠한 시설이 있든지, 어떠한 시설의 길이 있든지, 어떠한 지혜가 있든지,

어떠한 지혜의 영역이 있든지, 어떠한 유전이 있든지, 924)

수행승은 그것을 곧바로 알아서 해탈했기 때문이다.

곧바로 알아서 해탈한 수행승을 두고

그는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

924) yāvatā ānanda adhivacanam yāvatam adhivacanapatho, yāvatā nirutti, yāvatā niruttipatho, yāvatā paññatti, yāvātā paññattipatho, yāvatā paññā, yāvatā paññāvacaram yāvatā vaſtam vaťtati : 원래 명칭이 있는 한이라는 뜻이고

Smv, 508에 따르면, ‘명칭이란 언설이 있는 한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역자는 '어떠한 명칭이든지'라고 의역한다. 어원이나 시설은 모두 언설을 의미한다.

Smv. 508에 따르면, 명칭의 길이란 존재의 다발(khandha :), 감각의 영역(avatana :), 인식의 세계(dhatu :)를 말하는 것이다.

지혜의 영역은 지혜에 의해서 알려지는 존재의 다발(五蘊)을 말한다.

 

 

 

 

Satta viññāṇaṭṭhiti (일곱 가지 의식의 주처)

 

 

127. ‘‘Satta kho, ānanda 

viññāṇaṭṭhitiyo, dve āyatanāni. Katamā satta?

 

 

1) Santānanda, sattā nānattakāyā nānattasaññino, seyyathāpi manussā,

ekacce ca devā, ekacce ca vinipātikā. Ayaṃ paṭhamā viññāṇaṭṭhiti.

2) Santānanda, sattā nānattakāyā ekattasaññino, seyyathāpi devā

brahmakāyikā paṭhamābhinibbattā. Ayaṃ dutiyā viññāṇaṭṭhiti.

3) Santānanda, sattā ekattakāyā nānattasaññino, seyyathāpi devā ābhassarā.

Ayaṃ tatiyā viññāṇaṭṭhiti.

4) Santānanda, sattā ekattakāyā ekattasaññino, seyyathāpi devā subhakiṇhā.

Ayaṃ catutthī viññāṇaṭṭhiti.

5) Santānanda, sattā sabbaso rūpasaññānaṃ samatikkamā paṭighasaññānaṃ atthaṅgamā

nānattasaññānaṃ amanasikārā ‘ananto ākāso’ti ākāsānañcāyatanūpagā.

Ayaṃ pañcamī viññāṇaṭṭhiti.

6) Santānanda, sattā sabbaso ākāsānañcāyatanaṃ samatikkamma ‘anantaṃ viññāṇa’nti viññāṇañcāyatanūpagā. Ayaṃ chaṭṭhī viññāṇaṭṭhiti.

7) Santānanda, sattā sabbaso viññāṇañcāyatanaṃ samatikkamma

‘natthi kiñcī’ti ākiñcaññāyatanūpagā. Ayaṃ sattamī viññāṇaṭṭhiti.

 

Asaññasattāyatanaṃ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meva dutiyaṃ.

 

40. [세존] “아난다여, 일곱 가지 의식의 주처 925)가 있고 두 가지 처소926)가 있다.

일곱 가지란 무엇인가?

 

1) 아난다여, 신체의 다양성과[69] 지각의 다양성을 지닌 뭇삶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인간들과 어떤 신들과 어떤 나쁜 곳에 떨어진 존재들이다.927) 그것이 첫 번째 의식의 주처이다.

 

2) 아난다여, 신체의 다양성을 지녔지만 지각의 통일성을 지닌 뭇삶들이 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선정을 통해 태어난 하느님 세계의 하느님의 권속인 신들이다. 928)

이것이 두 번째 의식의 주처이다.

 

3) 아난다여, 신체의 통일성을 지녔지만 지각의 다양성을 지닌 뭇삶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하느님 세계의 빛이 흐르는 신들이다. 929) 이것이 세 번째 의식의 주처이다.

 

4) 아난다여, 신체의 통일성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지각의 통일성을 지닌 뭇삶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하느님 세계의 영광으로 충만한 신들이다.930) 이것이 네 번째 의식의 주처이다.

 

5) 아난다여,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지각을 완전히 뛰어넘어 감각적 저촉의 지각 931)

사라진 뒤에 다양성의 지각에 대한 정신활동을 여임으로써 '공간이 무한하다.'라는 무한공간의 세계에 도달한 뭇삶들이 있다. 이것이 다섯 번째 의식의 주처이다.

 

6) 아난다여, 무한공간의 세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의식이 무한하다.'라는 무한의식의 세계에 도달한 뭇삶들이 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의식의 주처이다.

 

7) 아난다여, 무한의식의 세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아무것도 없다.' 라는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도달한 뭇삶들이 있다. 이것이 일곱 번째 의식의 주처이다.

그리고 처소에는 지각을 여읜 뭇삶들의 처소 932)

두 번째로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처소 933)가 있다.”

 

*****

925) satta viſiānatthiuyo : 한역에서는 칠식주(七識住)라고 한다.

Smv. 508에 따르면, 의식이 머물기 때문에 의식의 주처라고 한다.

 

926) dve ayatanani : 한역에서는 이처(二處)라고 한다. Smv, 509에 따르면,

일곱 가지 의식의 주처와 두 가지 처소를 합해서

아홉 가지 뭇삶의 주처(navarivasathāna :九衆生居)라고 한다.

 

(초불연주석) [20] 이 문맥에서부터 갑자기 알음알이의 거주처와 두 가지 장소,

그리고 팔해탈을 설하시는 이유는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25 ~26에서] 네 가지로 자아를 천명하지 않음을 통해 지속적으로 가면서 양면해탈을

하게 되고

[27~32] 세 가지로 유신견으로서의 자아를 관찰하지 않음을 통해서 해탈을 하게 된다.

이러한 [범부인] 두 부류의 비구들에 대한 벗어남과 그런 [혜해탈과 양면해탈]의 이름을

제대로 보여 주시기 위해서이다.”

 복주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부연하고 있다.

“'지속적으로 가면서'라는 것은[25 ~ 26] 사마타를 닦음이 잘 확립된 뒤에

위빳사나로 인도함과 도(magga)로 인도함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간다는 뜻이다.

양면으로 벗어나기 때문에 양면해탈이라 한다.”

부연해 설명하면 아래 34에서

알음알이의 거주처와 두 가지 장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과 벗어남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고서 해탈한다.

아난다여, 이를 일러 비구는 통찰지로써 해탈한 자(해탈자)라고 한다.”고 나타나 듯

알음알이의 거주처와 두 가지 장소를 통해 혜해탈자에 대한 설명과 이름을 드러내고 있고,

35 (성전협 51) 이하의

팔해탈과 상수멸을 통해서 양면해탈자에 대한 설명과 이름을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위에서 네 가지 자아와 세 가지를 통한 유신견을 파한 경지(27~32)

각각 양면해탈과 혜해탈인데,

이를 더 부연해서 상세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이제 알음알이의 거주처와 두 가지 장소와 팔해탈을 설한다는 것이다.

 

[21] “여기서 알음알이()가 머문다(문자로는 서있다)고 해서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알음알이가 [가서] 머무는 곳과 동의어이다.”

알음알이가 [가서] 머무는 곳이란 재생연결식이 지금 [가서] 머물기 때문이다.

특히 다섯 무더기(오온)를 가진 존재의 경우(욕계와 색계의 존재)

,,,행의 네 가지 무더기가 알음알이()의 거주처요

네 무더기를 가진 존재의 경우에는 (물질이 없는 무색계의 존재)

,,행의 세 가지 무더기가 알음알이의 거주처라고 알아야 한다.”

 

927) santi bhikkhave, sattā nānattakāyā nānattasaññino: seyyathāpi manussā ekacce ca devā ekacce ca vinipātikã :

1) 신체의 다양성 :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세계 (欲界: kāmavacara )에 속한 존재들,

인간들과 어떤 신들 그리고 나쁜 곳(惡趣)에 떨어진 자들은 신체의 다양성을 지닌다.

Smv. 509에 따르면, 헤아릴 수 없는 철위산(cakkavāla : 鐵圍山) 가운데서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이 있지만 색깔과 형태 등이 동일한 두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 쌍둥이의 색깔과 형태가 동일하더라도 그들은 앞에서 보거나 뒤에서 보거나 말하거나 웃거나 걷거나 서있는 동작에 의해서 명확히 구별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신체를 가진 것과 같다.

2) 지각의 다양성 : 결생의식(結生識:patisandhivināṇa)과 연결된 지각의 다양성을 말한다. , 악하고 불건전한 과보를 수반하는 유인(有因)의 결생(結生)과 관련되거나

착하고 건전한 것을 수반하는 무인(無因)의 결생과 관련된 지각의 다양성을 말한다.

[이때 여기서 무인(無因)이란 탐욕의 여윔, 성냄의 여워, 어리석음의 여임을 말한다.]

Smv, 509에 따르면, 그들의 결생상 (patisandhisanna)은 세 가지 원인을 갖거나,

두 가지 원인을 갖거나, 무인(無因)이다. 그래서 지각의 다양성을 지닌 자라고 한다.

[22] “여기서 중생(뭇삶)들이란 재생연결식으로 설하였다.[성전협 40- 2)]

즉 아비담바적으로 보면 어떤 곳에 재생연결식이 처음 생기는 것이 그곳에 중생이 태어나는 것이다

[23] 주석서에 의하면 여기서 어떤 신들이란 욕계 천상(六欲天)의 신들을 말한다.

주석서에서는 인간들과 여섯 욕계 천상의 신들과 일부 악처 중생들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928) santi bhikkhave, sattā nānattakāyā ekattasaññino:

seyyathāpi devā brahmakāyikā pathamābhinibbattā : 하느님의 권속인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Brahmalkayika deva : 梵衆天)의 태어남을 조건짓는 업은

첫 번째 선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상세한 것은 이 책의 부록 불교의 세계관을 참조하라.

 

929) santi bhikkhave, sattā ekattakāyā nānattasaññino: seyyathāpi devā ābhassarā :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Ābhāssarā deva :極光天, 光音天)의 태어남을 조건짓는 업은 두 번째 선정(二禪)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서의 분류는 두 번째 선정의 최고 단계이므로 세 번째 선정의 일부를 포괄하는 것이다. 상세한 것은 이 책의 부록 불교의 세계관을 참조하라.

 

930) santi bhikkhave, sattā ekattakāyā ekattasaññino: seyyathāpi devā subhakinhā: 영광이 충만한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Subhakinna devå : 遍淨天)의 태어남을 조건짓는 업은 세 번째 선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서의 분류는 세 번째 선정의 최고 단계이므로 네 번째 선정도 포괄하는 것이다. 상세한 것은 이 책의 부록 불교의 세계관을 참조하기 바란다.

 

931) patighasannanarm atthāgamā : 감각적 저촉(抵觸=障碍: patigha)’밖으로 향하는 의식에 제공된 저항'을 말한다. 우리는 그것으로 사물을 인식한다. Vibh.261, Vism 329

따르면, 감각적 저촉은 다섯 가지 감역에서 대상(형상, 소리, 냄새, , 감촉)의 충격을

말한다.

 

932) asaññasattāyatana : 한역의 무상유정처(無想有情處)를 말한다. 두 가지 처소의 하나이다. 지각을 여윈 뭇삶들지각을 여윈 뭇삶들(無想有情:asaññasattā)

의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의식의 주처에 포함되지 않고,뭇삶의 처소에 포함된다.

지각을 여읜 뭇삶에 대해서는 상세한 것은 이 책(DN. I. 28)과 그 주석을 보라.

 

933) nevasaññāsaññāyatana : 한역의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말하는데, 두 가지

처소 가운데 하나이다.Smv, 511에 따르면, 지각과 동일하게 의식도 미약하기 때문에

의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의식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의식의 주처에 포함되지 않고 뭇삶의 처소에 포함된다.

(초불연 ) 일곱 가지 의식의 주처와 두 가지 처소를 합해서

아홉 가지 뭇삶의 주처(navanivāsaṭṭhāna, 九衆生居)라 한다.

하느님 세계의 하느님의 권속인 신들(梵衆天)

하느님 세계의 영광으로 충만한 신들(光音天) :

여기서의 분류는 두 번째 선정의 최고 단계이므로 세 번째 선정의 일부를 포괄하는 것이다.

하느님 세계의 영광으로 충만한 신들[遍淨天] :

여기서의 분류는 세 번째 선정의 최고 단계이므로 네 번째 선정도 포괄하는 것이다.

지각을 여읜 뭇삶들의 처소(asaññasattāyatana) : 한역의 무상유정처(無想有情處) :

지각을 여읜 뭇삶들은 의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의식의 주처에 포함되지 않고

뭇삶의 처소에 포함된다.

무상유정처란 색계 제4선을 닦은 자들이 태어나는 색계의 세계(無想天)이며,

무상유정의 신들의 마음과 마음부수의 법들이며, 산냐()가 없는 색계

4선의 삼매상태이다.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nevasaññānāsaññāyatana)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처소로 지각과 동일하게 의식도 미약하기 때문에 의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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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Tatrānanda, yāyaṃ paṭhamā viññāṇaṭṭhiti nānattakāyā nānattasaññino,

seyyathāpi manussā, ekacce ca devā, ekacce ca vinipātikā.

Yo nu kho, ānanda, tañca pajānāti, tassā ca samudayaṃ pajānāti,

tassā ca atthaṅgamaṃ pajānāti, tassā ca assādaṃ pajānāti, tassā ca ādīnavaṃ pajānāti, tassā ca nissaraṇaṃ pajānāti,

kallaṃ nu tena tadabhinanditu’’nti?

‘‘No hetaṃ, bhante’’

41. 그런데 아난다여, 신체의 다양성과 지각의 다양성을 지닌 뭇삶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인간들과 어떤 신들과 어떤 나쁜 곳에 떨어진 자들의 첫 번째 의식의 주처인데,

아난다여, 그것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발생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소멸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유혹에 대하여 알고, 그것의 재난에 관하여 알고, 그것의 여윔에 대하여 분명히 안다면, 934) 그것에 환희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아난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

934) yo nu kho ānanda, tañca pajānāti, tassā ca samudayam pajānāti, tassā ca atthangamam pajānāti, tassāca assādam pajanati, tassã ca adinavam pajanati, tassa ca nissaraṇaṃ pajānāti : Smv. 511-512에 따르면,

'그것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는 그 의식의 住處를 분명히 알고'라는 뜻이고,

'그것의 발생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는 무명이 생겨남으로써 물질이 생겨난다는 등의 방식으로 그것의 발생을 분명히 알고라는 뜻이고,

'그것의 소멸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라는 것은 무명이 소멸함으로써 물질이 소멸한다는

등의 방식으로 그것의 소멸을 분명히 알고'라는 뜻이고,

'그것의 유혹에 대하여 알고'라는 것은 '물질을 조건으로의식을 조건으로

즐거움의 쾌감이 생겨나는데, 이것이 의식의 유혹이라고 분명히 알고'라는 뜻이고,

'그것의 위험에 관하여 알고는 물질은 의식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의식의 위험이다라고 분명히 알고'라는 뜻이고,‘

그것의 여임에 대하여 분명히 안다.'는 것은 '물질에 대하여 의식에 대하여

탐욕의 제어, 탐욕의 끊음이 그 의식의 여윔이라고 분명히 안다.'라는 뜻이다.

 

--pe----------[42.~ 47.]

 

42. [세존] “아난다여, 신체의 다양성을 지녔지만 지각의 통일성을 지닌 뭇삶들이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선정을 통해 태어난 하느님 세계의 하느님의 권속인

신들이 두 번째 의식의 주처인데, 그것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발생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소멸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유혹에 대하여 알고, 그것의 재난에 관하여 알고, 그것의 여임에 대하여 분명히 안다면, 그것에 환희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아난다여, 각자 다른 몸을 가졌지만 모두 같은 인식을 가진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여기 이 세상에서] 초선을 닦아서 죽은 뒤 태어난 범중천의 신들이다.

이것이 두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그런데 이러한 두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를 꿰뚫어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위험을 꿰뚫어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꿰뚫어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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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아난다여, 신체의 통일성을 지녔지만 지각의 다양성을 지닌 뭇삶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하느님 세계의 빛이 흐르는 신들이 세 번째 의식의 주처인데,

그것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발생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소멸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유혹에 대하여 알고, 그것의 재난에 관하여 알고, 그것의 여읨에 대하여 분명히 안다면, 그것에 환희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아난다여각자 같은 몸을 가졌지만 각자 다른 인식을 가진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광음천의 신들이다. 이것이 세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를 꿰뚫어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위험을 꿰뚫어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꿰뚫어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44. 아난다여, 신체의 통일성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지각의 통일성을 지닌 뭇삶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하느님 세계의 영광으로 충만한 신들이 네 번째 의식의 주처인데,

그것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발생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소멸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유혹에 대하여 알고, 그것의 재난에 관하여 알고, 그것의 여읨에 대하여

분명히 안다면, 그것에 환희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아난다여, 모두 같은 몸을 가졌고 모두 같은 인식을 가진 중생들이 있다.

예를 들면 변정천의 신들이다. 이것이 네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그런데 이러한 네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를 꿰뚫어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위험을 꿰뚫어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꿰뚫어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45. 아난다여,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지각을 완전히 뛰어넘어 감각적 저촉의 지각이 사라진 뒤에 다양성의 지각에 대한 정신활동을 여읨으로써 공간이 무한하다.’라는

무한공간의 세계에 도달한 신들이 다섯 번째 의식의 주처인데,

그것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발생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소멸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유혹에 대하여 알고, 그것의 재난에 관하여 알고,

그것의 여읨에 대하여 분명히 안다면, 그것에 환희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아난다여, 물질()에 대한 인식(산냐)를 완전히 초월하고, 부닫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에 새겨두지(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도달한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다섯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그런데 이러한 다섯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를 꿰뚫어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위험을 꿰뚫어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꿰뚫어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46. 아난다여, 무한공간의 세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의식이 무한하다.’라고

무한의식의 세계에 도달한 뭇삶들이 여섯 번째 의식의 주처인데,

그것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발생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소멸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유혹에 대하여 알고, 그것의 재난에 관하여 알고,

그것의 여읨에 대하여 분명히 안다면, 그것에 환희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아난다여,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알음알이()'라고 하면서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도달한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그런데 이러한 여섯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를 꿰뚫어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위험을 꿰뚫어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꿰뚫어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47. 아난다여, 무한의식의 세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아무 것도 없다.’라는

아무 것도 없는 세계에 도달한 뭇삶들이 일곱 번째 의식의 주처인데,

그것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발생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소멸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유혹에 대하여 알고, 그것의 재난에 관하여 알고,

그것의 여읨에 대하여 분명히 안다면, 그것에 환희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아난다여, 일체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도달한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일곱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곱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를 꿰뚫어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위험을 꿰뚫어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꿰뚫어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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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trānanda, yamidaṃ asaññasattāyatanaṃ.

Yo nu kho, ānanda, tañca pajānāti, tassa ca samudayaṃ pajānāti,

tassa ca atthaṅgamaṃ pajānāti, tassa ca assādaṃ pajānāti, tassa ca ādīnavaṃ pajānāti, tassa ca nissaraṇaṃ pajānāti, kallaṃ nu tena tadabhinanditu’’nti?

‘‘No hetaṃ, bhante’’.

 

48. 그런데 아난다여, 지각을 여읜 뭇삶의 처소가 있는데,

아난다여, 그것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발생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소멸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유혹에 대하여 알고, 그것의 재난에 관하여 알고,

그것의 여읨에 대하여 분명히 안다면, 그것에 환희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아난다여, 무상유정처(無想有情處)를 꿰뚫어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위험을 꿰뚫어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꿰뚫어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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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trānanda, yamidaṃ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ṃ.

Yo nu kho, ānanda, tañca pajānāti, tassa ca samudayaṃ pajānāti, tassa ca atthaṅgamaṃ pajānāti,

tassa ca assādaṃ pajānāti, tassa ca ādīnavaṃ pajānāti, tassa ca nissaraṇaṃ pajānāti,

kallaṃ nu tena tadabhinanditu’’nti?

‘‘No hetaṃ, bhante’’.

 

49. 또한 아난다여,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처소가 있는데,

아난다여, 그것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발생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소멸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유혹에 대하여 알고,

그것의 재난에 관하여 알고, 그것의 여읨에 대하여 분명히 안다면,

그것에 환희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아난다여,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꿰뚫어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꿰뚫어 알고 그것의 위험을 꿰뚫어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꿰뚫어 아는 자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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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to kho, ānanda, bhikkhu imāsañca

sattannaṃ viññāṇaṭṭhitīnaṃ imesañca dvinnaṃ āyatanānaṃ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ṃ viditvā

anupādā vimutto hoti, ayaṃ vuccatānanda, bhikkhu paññāvimutto.

 

50.이와 같이 아난다여, 수행승은 이러한 일곱 가지 의식의 주처와 이러한 두 가지 처소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발생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소멸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그것의 유혹에 대하여, 알고, 그것의 재난에 관하여 알고,

그것의 여읨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아서, 집착 없이 해탈한다.

그래서 아난다여, 그 수행승은 지혜에 의한 해탈을 이룬 자 935)라고 불린다.”

 

****

935) paññāvimutto. : Smv. 512에 따르면, 지혜를 통해서 해탈한 자(慧解脫)인데,

여덟 가지 해탈을 실현하지 않고 지혜의 힘만으로 정신적 요소와 물질적 요소가 생기하지 않는 것을 이루어 해탈한 자라는 뜻이다.

그는 건조한 통찰자(sukkhavipassaka)인데, 첫 번째 선정 등 어느 것에도 머물며,

거룩한 경지(阿羅漢果)에 도달했기 때문에, 여기에는 다섯 종류가 있다.

 

(초불열 주석) 여기서 알음알이와 거주처와 두 가지 장소 그리고 여덟가지 해탈을

설하시는 이유를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25-26에서 네 가지 자아천명-

1) 물질을 가진 유한한 자아 2) 물질은 가진 무한한 자아

3) 물질을 가지지 않은 유한한 자아 4) 물질을 가지지 않은 무한한 자아를

천명하지 않음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가면서 양면해탈(兩面解脫)을 하게 되고

27-32에 세 가지 - 1) 느낌은 나의 자아다

2)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끼지 않는다

3)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의 자아는 느낀다. 나의 자아는 느끼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라고

관찰하지 않음을 통해서 혜해탈(慧解脫)을 하게 된다.

이러한 두 부류의 비구들에 대한 벗어남과 혜해탈과 양면해탈의 이름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 이다.(DA.ii.508)

 

* 알음알이가 머무는 곳(識住處)

알음알이가 머무는 곳이란 재생연결의식이 지금(가서) 머물기 때문이다.

뜻으로는 특히 다섯 무더기를 가진 존재의 경우(즉 욕계와 색계의 존재)에는

색수상행의 네 가지 무더기가 알음알이의 거주처요,

네 무더기를 가진 존재의 경우(즉 물질이 없는 무색계의 존재)에는

수상행의 세 가지 무더기가 알음알이의 거주처라 알아야 한다(DAT.ii.148-49)

 

Aṭṭha vimokkhā (여덟 가지 해탈)

 

129. ‘‘Aṭṭha kho ime, ānanda, vimokkhā. Katame aṭṭha?

 

51. [세존] “아난다여. 이와 같이936) 여덟 가지 해탈937)이 있다.

여덟 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1) Rūpī rūpāni passati ayaṃ paṭhamo vimokkho.

2) Ajjhattaṃ arūpasaññī bahiddhā rūpāni passati, ayaṃ dutiyo vimokkho.

3) Subhanteva adhimutto hoti, ayaṃ tatiyo vimokkho.

4) Sabbaso rūpasaññānaṃ samatikkamā paṭighasaññānaṃ atthaṅgamā

nānattasaññānaṃ amanasikārā

‘ananto ākāso’ti ākāsānañc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ti, ayaṃ catuttho vimokkho.

5) Sabbaso ākāsānañcāyatanaṃ samatikkamma

‘anantaṃ viññāṇa’nti viññāṇañc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ti, ayaṃ pañcamo vimokkho.

6) Sabbaso viññāṇañcāyatanaṃ samatikkamma

‘natthi kiñcī’ti ākiñcaññ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ti, ayaṃ chaṭṭho vimokkho.

7) Sabbaso ākiñcaññāyatanaṃ samatikkamma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ti,ayaṃ sattamo vimokkh.

8) Sabbaso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ṃ samatikkamma

saññāvedayitanirodhaṃ upasampajja viharati,ayaṃ aṭṭhamo vimokkho.

 

Ime kho, ānanda, aṭṭha vimokkhā.

 

1) 색깔을 지닌 자로서 색깔들을 본다. 938) 이것이 첫 번째 해탈이다.

2) 안으로 색깔에 대한 지각을 여의고, 밖으로 색깔들을 본다. 939) 이것이 두 번째 해탈이다.

3) 오로지[71] 아름다운 것에만 전념한다. 940) 이것이 세 번째 해탈이다.

4)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지각을 완전히 뛰어넘어 감각적 저촉의 지각이 사라진 뒤에

다양성의 지각에 대한 정신활동을 여윔으로써 '공간이 무한하다.‘라고 알아채며

무한공간의 세계를 성취한다. 이것이 네 번째 해탈 941)이다.

5) 무한공간의 세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의식이 무한하다.'라고 알아채며

무한의식의 세계를 성취한다. 이것이 다섯 번째 해탈이다.

6) 무한의식의 세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아무 것도 없다.' 라고 알아채며

아무 것도 없는 세계'를 성취한다. 이것이 여섯 번째 해탈이다.

7) 아무 것도 없는 세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를 성취한다. 이것이 일곱 번째 해탈이다.

8)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다. 이것이 여덟 번째 해탈이다.

 

아난다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해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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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6) kho ime ānanda : Smv, 512에 따르면, 이상과 같이

<일곱 고귀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수행승의 욕망의 여임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이룬 자>를 거론한 이후에

<양면으로 해탈을 이룬 자(ubhatobhāgavimutta)>에 관하여 가르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937) attha vimokkhā : 팔해탈(aṭṭhamm vimokkho : 八解脫)을 말한다.

해탈은 Smv512 따르면, 어떠한 의미에 의해서 해탈인가?

일시적 해탈(adhimuccana)이라는 의미에 의해서이다. 그러면 일시적 해탈은 무슨 의미인가? 장애의 상태로부터의 일시적 해탈의 의미가 있고,

또한 대상에 대한 환희에서 오는 일시적 해탈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품안에서 온몸을 맡기고 잠드는 것처럼, 억압없이 의심없이,

대상 가운데 몰입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일시적 해탈의 의미는 최후의 해탈(여덟 번째 해탈)에는 없고 이전의 모든 단계에 존재한다.

 

(초불연 주석)[24]“해탈은 무슨 뜻에서 해탈이라 하는가? 벗어남의 뜻에서 해탈이라 한다.

그러면 이 벗어남의 뜻이란 무엇인가?

반대되는 법들로부터 잘 벗어난다는 뜻이며, 대상을 즐기는 것을 잘 벗어난다는 뜻이다.

아버지의 무릎에서 사지를 늘어뜨리고 잠든 어린아이처럼 거머쥐고 있지 않은 상태로

어떠한 의심도 없이 대상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설하신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여덟 번째 해탈]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처음의 7가지에만 있다.”

벗어남의 뜻인 상수멸이라는 이 마지막 [여덟 번째] 해탈에는 없다.

[여덟 번째 해탈]에는 다만 해탈했음의 뜻만이 적용된다.”

, 상수멸은 마음과 마음부수 모두가 소멸된 경지이므로

반대되는 법들이니 대상이니 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남이라는 해탈의 뜻은 적용되지 않고

오직 해탈했음이라는 근본적인 뜻만이 적용된다는 말이다.

 

938) rūpī rūpani passati, ayaṃ pathamo vimokkho :

자신의 몸의 색채적인 대상에서 유래하는 가득채움의 수행(kasina : 遍處)'을 통한

네 가지 선정(cattāri jhānāni : 四禪)의 성취를 말한다. Smv. 513에 따르면,

내적인 머리카락등에서 푸른 색의 가득채움의 명상영역을 얻어 선정에 드는 것을 말한다.

[25] ‘색계에 속하는 [에 들어] [밖으로] 물질들을 본다고 옮긴 원어를 직역하면

물질을 가진 자가 물질들을 본다이다.

주석서에서는 안으로 머리털 등에서 푸른색의 까시나 등을 통해서

생겨난 색계선들의 물질이 그에게 있다고 해서 물질을 가진 자라 한다.”라고 설명한다.

 

939) ajjhattam arūpasaññi bahiddhā rūpāni passati. ayam dutiyo vimokkho :

외부적인 대상에서 유래하는 가득채움의 수행'을 통한 네 가지 선정의 성취를 말한다.

Smv, 513에 따르면, 내적인 머리카락 등에서 선정을 얻을 수 없는 자는

외적인 청련 등의 색을 선안(jhānacakkhu:禪眼)으로 봄으로서 선정을 얻는다.

[26] “’안으로 물질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서라는 것은

자신의 머리털 등에서 색계선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밖으로 준비단계의 수행을 짓고서 밖으로 을 일으킨 사람의

색계선들을 보이신 것이다.” 즉 안의 물질을 대상으로 삼아서 삼매에 들지 않고

밖의 물질을 대상으로 삼아서 색계선에 드는 사람을 말한다.

 

“'밖으로 물질들을 본다.’는 것은 밖으로도 푸른색 등의 까시나의 물질들을

의 눈으로 본다는 뜻이다.

이것을 통해 안과 밖의 토대들을 가진 까시나들에서 생긴

갖춘 사람의 네 가지 색계선들을 보이신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요약하면 이 수행자는 안의 물질을 대상으로 삼아서도 색계선에 들고

밖의 물질을 대상으로 삼아서도 색계선에 든다는 의미이다.

물질을 대상으로 을 닦으면 거기서는 반드시 표상이 일어나는데

표상은 근접의 표상 -> 익힌 표상 -> 닮은 표상으로 발전하고,

닮은 표상이 확립될 때 그것을 대상으로 본삼매에 든다.

이것이 [청정도론] 등의 주석서 문헌에서 한결같이 설하는

물질을 대상으로 한 삼매 수행의 과정이다

 

940) subhan t'eva adhimuto hoti. ayam tatiyo vimokkho : Smv. 513에 따르면,

지극히 청정한 푸른 색 등의 두루채움의 명상대상에 대한 선정에 든 자가

근본정(根本定)에서 아주 순수하고 아름다운 가득채움의 명상대상(遍處)'을 닦는 자를 말한다. 그러나 이 세 번째 해탈자는 Pps, III. 256; PS. II 39에 따르면,

네 가지 청정한 삶 또는 네 가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cattāro brahmavihārā : 四梵住)을 통한 선정의 성취이다.

 

941) ayam catuttho vimokkho :Smv, 513에 따르면, 그 나머지의 해탈은 네 가지 비물질적인 세계의 선정인 사무색계선(四無色界禪)과 지각과 느낌의 소멸인 멸진정(滅盡定)

말한다.

10개의 까시나로 색계사선정을 얻었다면, 4무색계라 불리는 4무색계 선정으로

나아갈 수 있다. 4무색계 선정-

1. 공무변처(空無邊處, ākāsānañcāyatana)

2. 식무변처(識無邊處, viññānañcāyatana)

3. 무소유처(無所有處, ākiñcaññāyatana)

4.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Nevasaññā nāsaññayatana)

 

[27] 이 경지를 想受滅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 경지에서는

인식()과 느낌()이라는 마음의 상카라들(心行)이 완전히 없어지기() 때문이다

(청정도론 XXIII.24).

초기경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상수멸로 나타나는데 아비담마와 주석서 등에서는

niroddha-samāpatti(滅盡定)란 용어가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

( samāpatti가 단독으로 쓰이면 증득으로 쓰이고 과의 증득(bhalasamāpatti)이 있다.)

상수멸과 멸진정은 동의어이다.

이 상수멸의 경지는 불환과 이상의 성자들만이 체득할 수 있는 경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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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Yato kho, ānanda, bhikkhu ime aṭṭha vimokkhe

anulomampi samāpajjati, paṭilomampi samāpajjati, anulomapaṭilomampi samāpajjati, yatthicchakaṃ yadicchakaṃ yāvaticchakaṃ samāpajjatipi vuṭṭhātipi.

Āsavānañca khayā anāsavaṃ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ti,

ayaṃ vuccatānanda, bhikkhu ubhatobhāgavimutto.

Imāya ca ānanda ubhatobhāgavimuttiyā aññā ubhatobhāgavimutti

uttaritarā vā paṇītatarā vā natthī’’ti.

 

52. 아난다여, 수행승은 이러한 여덟 가지 해탈을

그가 원할 때마다, 그가 원하는 곳마다, 그가 원하는 한, 순차적으로 들기도 하고

역차적으로 들기도 하고 순역으로 들기도 하고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

아난다여, 그는 현세에서 번뇌를 부수어 번뇌를 여윈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한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이러한 수행승을 양면에 의한 해탈942) 을 이룬 이라고 한다.

아난다여, 이러한 양면에 의한 해탈보다도 더욱 수승하고 더욱 탁월한 다른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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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2) ubhatobhāgavimitta : Smv. 514에 따르면, 양면에서 해탈한 자로

미세한 물질계의 선정성취(arūpasamāpatti)에 의해서 물질적인 몸(rūpakāya)에서 해탈하고,

(magga)을 통해서 정신적인 몸(namakaya)에서 해탈한 자를 말한다. 그런데

그 양면으로 해탈한 자는 무한공간의 세계 등에서 나와 거룩한 경지를 얻은 자(四種)

돌아오지 않는 님으로 멸진정에서 나와 거룩한 경지를 얻은 자(一種)의 다섯 종류가 있다.

 

(초불연 주석)[28] 네가지 선()을 두루 닦아 그 힘으로 여러 신통지를 얻는 것

심해탈(心解脫, ceto-vimutti)이라 하고 , 통찰지를 통해서만 해탈을 성취하는 것을

혜해탈(慧解脫. panna-vimutti)이라고 부른다.

이 둘을 갖춘 것을 양면해탈(兩面解脫)이라고 부르고 있다.

심해탈이라고 하지만 마음을 하나로 집중하는[心一境, citta-ekaggata] 삼매만으로는

해탈을 성취할 수 없고 이 경우에도 번뇌를 멸하는 통찰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여

삼매[]와 통찰지[] 혹은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두(ubhato) 부분(bhaga)을 다 닦아서

성취한 해탈이라 하여 양면해탈이라고 한다.

통찰지가 없이는 해탈이 불가능하고, 선정의 힘이 아니면 통찰지가 생길 수 없다는 점은

초기경에서 부터 남북방 불교에서 모두 다 강조하고 있다.

한편 사마타와 위빳사나라는 술어는 초기경에서도 거의 대부분 함께 붙어서 나타나며

부처님께서는 이 둘을 부지런히 닦을 것을 강조하셨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도 止觀수행이 크게 성행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보조국사께서 定慧雙修를 주창하신 것이다.

 

[29] “양면해탈이란 두 부분으로 해탈한 것이니

무색의 증득(*arūpasamāpatti)으로 물질의 무리(色身)로부터 해탈하였고,

(*magga)에 의해서 정신의 무리(名身)로부터 해탈하였다는 뜻이다.

양면해탈은 공무변처 등의 어떤 경지로부터 출정하여(出定) 아라한과를 얻는 것 네가지 와

불환자가 된 뒤 멸진정으로부터 출정하여 아라한과를 얻는 것으로 모두 다섯 가지가 있다.”

이것이 양면해탈에 대한 주석서의 정리된 설명으로 잘 알려진 것이다.

여기서 보듯 양면해탈은 반드시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공무변처부터 비상비비상처까지의

4 무색정 가운데 하나에 들었다가 출정해서 아라한도를 증득해야 한다.

아라한도 등의 [네 가지] 도는 반드시 위빳사나를 통해야 가능하다.

이렇게 사마타를 통해서 4무색계정 가운데 하나를 증득하고

위빳사나를 통해서 아라한이 되는 것을 양면해탈이라 한다.

33의 첫 번째 주해에서 인용했듯 사마타를 닦음에 잘 확립된 뒤에

위빳사나로 인도함과 도(magga)로 인도함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간다.”라고도

설명하는 것이다.

한편 통찰지의 해탈(慧解脫) 색계4선 이하를 증득한 뒤 출정하거나

아예 의 증득 없이 위빳사나를 통해서 아라한도를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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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amavoca bhagavā.

Attamano āyasmā ānando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īti.

53.이와 같이 세존께서 말씀하시자, 존자 아난다는 세존께서 하신 말씀에 만족하며 기뻐했다.

 

Mahānidānasuttaṃ niṭṭhitaṃ dutiyaṃ.

인연의 큰 경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