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오래전 젊은 날의 방황은
내 발걸음을 지리산을 휘감아 도는 섬진강가로 데려다 놓았다.
낙엽지는 늦가을
부산 용두산 공원길을 노랗게 물들인 은행나무 밑에
숨어들려는 발자국을 구슬러
저 짝 흐르는 강소리 들으며
너 또한 흘려보내자고 채근했다.
섬진강 모래톱에선 신발을 신고 걷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허리를 숙여 귀를 낮게 열어도
강의 울음을 끝내 듣지 못한 날도 있다.
어떨 땐 천둥소리처럼 어떨 땐 새소리처럼 제 소리를 내던 날엔
발을 담그지 않아도 이미 젖어버린 몸은
어느듯 모래톱에 뉘여진다.
누워 마주했던 지리산 섬진강가 까만 밤
은하수가 보름달 대신 내 눈가를 적시며 반짝였다.
강은 눕고 나는 떠오른다.
까만밤에 별이 되었던 그날들이
새벽 강위에 머무는 안개속으로 내려앉고
강은 아침이슬처럼 깨어나
온갖 이름을 버리고 바다에 이른다.
정희성 시인의 강이 음유시인 정태춘의 북한강으로 흐르고
지리산을 만나 섬진강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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