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法(가르침, Dhamma )을 傳하거나 說할 때는....
* 하늘나라와 인간세계 , 그 모든 *올가미*에서 벗어난 그대 수행승들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
수행승들이여, 처음도 훌륭하고 가운데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이 풍부하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 의미와 문장을 갖춘 法 [마하박가] )을 펴라.
오로지 깨끗하고 청정한 삶을 드러내라. 더러움에 덜 물든 사람도 있다.
그들은 가르침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버려지고 있지만 가르침을 들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나도 역시 가르침을 펴기 위해서 우루벨라의 쎄나니 마을로 가겠다." (Dutiyapāsasuttaṃ.-올가미경, S4.1.5)
라며 傳法宣言을 하셨죠.
위 올가미경에서...
가름침을 들으면 알 수 있을 더러움에 덜 물든 사람들이란....
예리한 이해경(Ugghaṭitaññūsuttaṃ AN 4.133)에 ‘Puggalapaññatti’와 그에 대한 주석서를 보면.....
1. Ugghaṭitaññū
탁발에 나선 앗사지 존자의 청정함에 이끌려 따라가서
”당신의 스승은 누굽니까 ? 무엇을 가르칩니까 ?“ 라는 질문에
“모든 것은 원인으로부터 생긴다. 여래는 그 원인을 설했다.
그리고 그것의 소멸 역시 설했다(Ye dhammā hetuppadhavā, Tesam hetum tathāgato āha)“라는
[짧은 게송만 듣고도 법을 깨닫는] 예리한 지혜를 가진 1아승지 10만 대겁 동안 윤회하며
*바라밀 parami*을 채웠던 우빠띳사(Upatissa, 사리뿟따 존자)/ 꼴리따(Kolita,목갈라나) 같은 자
2. Vipañcitaññū:
사성제 대한 [상세한 설명(授記) ]이 설해졌을 때
'일어나는 법은 그 무엇이건 모두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集法卽滅法)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ntaṃ nirodhadhammanti”'
(초전법륜初轉法輪경-S56:11/ 증일아함 10권 24 고당품),라는
티 없고 때가 없는 법의 눈(法眼)이 생긴 오비구 중 꼰단냐 존자 같은
[상세한 설명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자]와
*초전법륜의 꼰당냐의 ‘수다원 오도송’을 접하다 보면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꼰당냐가 이해함으로 인하여 증명되며
처음으로 법의 바퀴가 굴러 간 것입니다.
이에 부처님께서“꼰당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 꼰당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
(aññāsi vata bho koṇḍañño, aññāsi vata bho koṇḍaññoti) ” (S56.11,전재성님역)
라고 말씀하셨지요.
3. Neyya puggala
단지 대략의 말이나 자세한 설명만 들어서는 깨달을 수 없어,
부처님의 가르침에 설해진 대로 삼학을 체계적으로 수행해야 할 필요가 있는,
지도, 질문, 조심스러운 주의력, 좋은 도반에게 의지함 등을 통해 점차적으로 법을 깨닫는 자
4. Padaparama
많이 듣고, 독송하고, 마음에 간직하고 배워도 이번 생에서는 법을 깨달을 수 없어,
열심히 수행하고 많은 시간을 명상한다 해도 현재의 삶에서는 본삼매를 얻거나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를 얻을 수 없고, 수행은 단지 바라밀을 채우고
다음 생에 법을 깨닫기 위한 자들과 같은
<네 부류의 사람들>이 연결되네요.
또한 Netti pakaraṇa Hāravibhaṇga (마하 깟자나존자)에는
거기에서 나타냄은 처음이고, 설명은 중간이고, 상세함은 마지막이다.
(Tattha ugghaṭanā ādi , vipancana majjhe , vitthāraṇā pariyosānaṃ.)
- 이 나타난 법과 율은 ‘나타난 것만으로도 아는 사람’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그것을 일컬어 “처음이 좋다”라고 한다.
-이 설명된 법과 율은 ‘설명으로 아는 사람’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그것을 일컬어 “중간이 좋다”라고 한다.
-이 상세한 법과 율은 ‘안내를 받아야 할 사람’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그것을 일컬어 “마지막이 좋다”라고 한다. 라는 말씀 또한 전해집니다.
------------
네 가지 특징을 갖춘 훌륭하게 설해진 말(善說. sutta)은
양식 있는 사람에 의해 비난 받지 않고 질책당하지 않는다는...
-잘 설해진 말씀의 경[Subhasita sutta]을 보면
“첫째, 법(dhamma)을 따르는 진실한 참사람(德人,善士)은 잘 설해진 것을 최상이라고 부른다.
둘째, 가르침만을 말하고 가르침이 아닌 것은 말하지 않는다.
셋째, 사랑스런 것만을 말하고 사랑스럽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는다.
넷째, 진실한 것만을 말하고 거짓은 말하지 않는다.“ 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시자
이에 왕기사 존자께서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고,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는 그러한 말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말 잘 설해진 말입니다.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말, 사랑스런 말만을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불화를 가져오지 않고 ,
사랑스러운 것에 대해서만 말해야 합니다.
진실은 참으로 불사(감로,甘露)의 말이니,
그것은 영원한 가르침입니다.
진실 속에, 유익함 속에, 가르침 속에 참사람들이 서 있다고 합니다.
열반을 성취하기 위하여, 괴로움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안온한 말씀 그것은 참으로 말씀 가운데 최상입니다.”라며
세존 앞에서 아름다운 시를 읊었지요.
이처럼 세존이 설하신 것은 단 하나의 게송이라도 더할 나위 없이 감탄을 자아내기 때문에
그 [게송]의 첫째도, 중간도, 마지막 구(句)도 좋고
같은 뜻이나 여러 뜻을 나열하는 경[sutta,善說]은
서론(序分)으로 처음이 , 결론(流通分)으로 끝이, 나머지(正宗分)로 중간도 좋지요.
또 서론은 그것을 설하게 된 動機로서 처음이 좋고,
제도하려는 이들의 근기에 따른다고 해서 뜻이 전도되지 않고 또 원인과 비유가 적절하기 때문에 중간도 좋고,
경청하는 이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결론으로 끝도 좋다지요.
(청정도론, 제7장 여섯가지 계속해서 생각함, 법수념)
이러한 전도선언에서 보면
- “ 법(가르침)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고,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 A.iii.285)
이는 시간과 공간과 세상을 뛰어넘은 가르침 이였고...
--- 부처님의 8만4천법문에 대한 ‘방편설(方便說)’과 차제설법
가르침을 받아 들이는 사람들은 그 기질과 성향이 모두 달라
청정도론에 따르면
1) 탐하는 기질, 2) 성내는 기질, 3) 어리석은 기질, 4) 믿는 기질,
5) 지적인 기질, 6) 사색하는 기질로 분류되는데
이렇게 중생들의 다양한 근기에 맞게 설하진 부처님의 법문을
방편설(方便說), 또는 대기설법(對機說法 pariyāya-desanā)이라 합니다.
[세존]
아난다여,
이와 같이 나의 가르침은 여러 가지 다른 방편으로 설해진 것이므로,
만약 사람들이 그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것을 서로 시인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고, 그것에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말다툼하고 언쟁을 하고 논쟁하고 서로 입에 칼을 물고 찌를지도 모른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나의 가르침은 방편으로 설해진 것이므로,
만약 사람들이 그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것을
서로 시인하고, 인정하고, 그것에 기뻐한다면,
그들에게는 조화로움, 기뻐함, 평화로움, 물과 우유 같은 화합이 생겨나고, 서로 사랑하는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Evaṃ pariyāyadesite kho ānanda mayā dhamme ye aññamaññassa subhāsitaṃ sulapitaṃ na samanujānissanti, na samanumaññissanti, na samanumodissanti, tesametaṃ pāṭikaṅkhaṃ: bhaṇḍanajātā kalahajātā vivādāpannā aññamaññaṃ mukhasattīhi vitudantā viharissanti. Evaṃ pariyāya desito kho ānanda mayā dhammo. Evaṃ pariyāya desite kho ānanda mayā dhamme ye aññamaññassa subhāsitaṃ sulapitaṃ samanujānissanti, samanumaññissanti, samanumodissanti, tesametaṃ pāṭikaṅkhaṃ: samaggā sammodamānā avivadamānā khīrodakībhūtā aññamaññaṃ piyacakkhūhi sampassantā viharissantīti.)
(Bahuvedaniya -여러 가지 느낌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59, 전재성님역)
[세존]
아난다여, 사람은
- ‘나는 *순서에 맞는* 설법을 하겠다.’라고... (Ānupubbīkathaṃ kathessāmīti paresaṃ dhammo desetabbo)
‘나는 # 논리적인 # 설법을 하겠다.’라고... (Pariyāyadassāvī kathaṃ kathessāmīti paresaṃ dhammo desetabbā )
‘나는 자비에 입각해서 설법을 하겠다’라고... (Anuddayataṃ paṭicca kathaṃ kathessāmīti paresaṃ dhammo desetabbo)
‘나는 재물을 위해서 설법을 하지 않겠다’라고... (Na āmisantaro kathaṃ kathessāmīti paresaṃ dhammo desetabbo
‘나는 자신과 타인을 해침이 없이 설법을 하겠다.’라고.... (Attānaṃ caparaṃ ca anupahacca kathaṃ kathessāmīti paresaṃ dhammo desetabbo)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설해야 한다. (Udāyīsutta- 우다인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159)
여기서
*순서에 맞게 (Ānupubbīkathaṃ kathessāmīti)’ 라는 말은 * 차제설법(次第說法)으로
(Ānupubbīkathaṃ kathessāmīti : MN.56; DN.3)에 따르면,
보시를 설한 다음에 계행을 설하고
계행을 설한 다음에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설하고,
다음에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재난과 욕망의 여읨의 공덕을 설하고,
그 다음에 부처님의 본질적인 가르침인 네 가지 거룩한 진리와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설한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윤리적인 것보다 수승한 수행적 관점을 설하는 것을 말한다.
( A5.159, 375번 각주, 전재성님)
# “나는 논리적인 설법을 하겠다.(Pariyāyadassāvī kathaṃ kathessāmīti) ”
*방편설(pariyāya-desanā)로 각자 근기에 맞춘 “맞춤설법”을 말하는 것으로
각주를 보면, “각각의 의미와 그 각각의 원인을 보여주면서 설법하는 것이다. (Mrp.III.293)”
-방편설 또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는 것은
마치 프리젠테이션 하듯이 누구나 알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빠리야야(pariyāya)는 ‘order; course; quality; method; figurative language;
a synonym; a turn.’의 뜻을 가지고 있다. 특히 제1의 뜻이 ‘order(순서)’임]
이처럼 근기에 맞게 차제와 방편, 대기설법을 하 듯,
깨달음도 또한 단계적으로 성취되니....
“수행승들이여,
커다란 바다는 점차적으로 나아가고 점차적으로 기울고 점차적으로 깊어지고 갑자기 절벽을 이루지 않듯,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가르침과 계율에서는 점차적인 배움, 점차적인 실천, 점차적인 진보가 있지
궁극적인 앎에 대한 갑작스런 꿰뚫음은 없다.” (Ud.51,A8.19)
<--- 보리도차제론(菩提道次第論, Bodhipathapradīpa 쫑카파)와 같은 논서가 나올수 밖에 없는 필연이 엿보이는 대목....
세상에 어떠한 수행자가 있습니까 ? 라는 대장장이(금세공업자) Cunda의 물음에...
붓다께선
"쭌다여,
길을 아는자(maggajino) , 길을 가르키는 자(maggadesako)
길위에 사는자 ( maggakkhayi, magge jivati), 길을 더럽히는 자 (maggadusi)
네 부류의 수행자가 있다 " (stn p. 16)
“쭌다여, 스스로 진흙에 빠진 사람이 다른 진흙에 빠진 사람을 건져 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쭌다여, 스스로 진흙에 빠지지 않은 사람만이 참으로 진흙에 빠진 다른 사람을 건져 올린다는 것이 가능하다.”
- ‘버리고 없애는 삶의 경'(M8)’
자신에게 번뇌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자신이 얼마나 청정한지 역시 자신이 잘 압니다.
누가 알려 주는 것도 아니고 인가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수행을 하여 마침내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음을 알게 되고 다시는 윤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알게 되면....
마침내,
“태어남은 부수어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 ”(S7.8)-와 같은
아라한선언이 스스로 드러나게 .....
해서... 가르침은 마땅히 이러해야 하고,
이에 찬사와 경배가 수레처럼 황소(dhuradorayha)의 걸음 뒤에 자연스레 뒤따르게 됩니다.
“세존이신 고따마시여, 훌륭하십니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가려진 것을 열어 보이듯이,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이,
눈을 갖춘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들어 올리듯이,
세존이신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evameva bhotā gotamena anekapariyāyena dhammo pakāsito)
그러므로 이제 세존이신 고따마께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수행승의 모임에 귀의합니다.
세존이신 고따마께서는 재가 신자로서 저희들을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 바쳐 귀의하겠습니다.” (귀의문 , 숫따니빠따)
----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vātam va jālamhi asajjamānaṃ)
[Muni(침묵의 해탈자) sutta - The Sage 성자의 경, 숫따니빠따 Sn1.12]